신종 코로나 바이러스의 공포! 우리의 조상들은 전염병에 어떻게 대처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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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종 코로나 바이러스의 공포! 우리의 조상들은 전염병에 어떻게 대처했나
  • 임영은 기자
  • 승인 2020.02.03 18: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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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요법부터 의학기관 설치까지, 나라를 휩쓴 역병을 막다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전세계 확진자 분포도 (사진 = 질병관리본부)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전세계 확진자 분포도 (사진 = 질병관리본부)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의 공포가 확산되고 있다. 3일 기준으로 총 15명의 국내 확진자가 발생했다. 처음 바이러스가 발생한 중국은 확진자 17천여명, 사망자 300여명으로 사스를 넘어선 수치다. 이에 따라 국민들의 불안감도 점점 고조되고 있다.

 

우리나라의 전염병은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삼국시대의 기록에서도 역병이 나타났다고 서술되어 있으나 구체적인 자료는 조선시대부터 명시되어 있다. 조선왕조실록에서 역질이라고 대부분 적혀 있으며 근대화가 진행되던 고종부터는 전염병으로 기록이 남아있다.

 

현대에 비해 의학기술이 부족했던 시기, 역병이 한 번 돌기 시작하면 고을 하나는 우습게 궤멸되었다. 평균적으로 3년에 1번꼴로 역질이 돌았으며 조선왕조실록에는 총 1,000건 이상의 역병에 대한 기록이 있다.

 

유독 전염병이 크게 돌던 시기가 있었는데 대부분 큰 전쟁이 있거나 기후가 급격하게 바뀐 때였다. 대표적으로 숙종 시기는 17세기 소빙기 기후가 도래되면서 급격히 기후가 변화했다. 그 여파로 개성(황해도)부터 경기북부를 지나 강원도까지 역병이 돌았고, 홍역도 크게 유행했다.

 

국보 제151호 조선왕조실록 (사진 = 문화재청)
국보 제151호 조선왕조실록 (사진 = 문화재청)

 

본격적으로 사망자의 수가 기록된 시기는 영조부터였다. 영조실록 54, 영조 17713일 기록에 호남에 큰 홍수가 지고, 관서에 큰 역질이 돌다 호남(湖南)에 큰 홍수가 져서 778()가 표류(漂流)하였으며, 큰 바람이 불어 나무가 꺾어지고 가옥(家屋)이 무너졌다. 관서(關西)에는 크게 역질(疫疾)이 돌아 사망한 자가 무릇 37백여 명이나 되었다는 구체적인 피해규모가 나타난다.

 

이런 전염병이 발생할 때마다 우리의 조상들은 어떤 방법으로 대처했을까. 조선시대에는 오늘날의 질병관리본부와 같이 활인서(活人署)’라는 곳을 설치해 의원과 의무(무당)을 배치, 역병이 발생할 때마다 약재와 인력을 제공했다.

 

민간요법도 성행했다. 태종시기에는 아예 연례행사로 화약을 설치해 터뜨려서 불을 이용한 역병 퇴치 의식을 진행했고, 선조 시기에는 관리들을 지방으로 파견해 치제(제사)를 지내게 했다. 활인서에서 의무(무당)을 배치했던 것으로 보아 민속신앙도 역병 퇴치에 한 몫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의학요법으로는 세종 시기에 구료라는 언급으로 약재를 제공하라는 지시가 있었으며, 고종 시기에는 소독예방규칙이라는 단어가 직접적으로 드러나서 질병에 대한 예방책이 현대화 됐다.

 

현대와 비슷한 대처법으로는 격리였다. 왕족도 예외 없이 역병에 걸리면 도성 밖으로 나가 생활해야 했으며 인력을 파견해 예의주시했다. , 시신이 발생하면 땅에 묻는 것이 아닌 화장을 통해 병체 생성을 막았다는 기록도 있다.

 

중국발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확산에 대한 공포가 막연한 현재, 의료적인 지식이 부족했던 조상들도 나름의 해결책으로 난관을 이겨내듯이, 전염병의 확산이 없기 위해서는 개인의 이기심보다는 배려심이 필요한 지금이다.

 

취재팀 임영은

lzs0710@icp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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