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자랑스러운 우리역사
상태바
고구려-자랑스러운 우리역사
  • 심연홍 기자
  • 승인 2020.03.09 16:0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충주 고구려비(忠州 高句麗碑)-국보 제205호

 

고구려는 막강했던 군사력으로 중원대륙까지 영토를 확장했던 위대한 나라였다. 고구려는 용맹스러운 철갑기병 개마무사(중무장을 하고서 갑옷을 입힌 말을 탄 기병)를 가지고 있었으며, 광개토대왕은 개마무사와 함께 영토를 북으로 남으로 광활하게 넓혀갔다. 광개토대왕의 뒤를 이은 장수왕 또한 마찬가지였다. 아버지인 선왕의 업적을 이어 국토를 확장하였다

 

[충주 고구려비(忠州 高句麗碑)]는 장수왕이 백제의 수도였던 한성을 함락하고 한반도 중부지역까지 장악하여 영토를 충주지역에까지 확장하였음을 의미한다. 이 비는 국보 제205호로 1981에 지정되었다. 장수왕이 남한강 유역의 많은 성을 공격하여 획득한 후, 그것을 기념하여 세운 비로 추정된다. 현재는 [충주비]로 불리는 [충주 고구려비]는 돌기둥 형태의 자연석을 사용하여 4면에 모두 글을 새겼다. 비의 모습이 만주의 광개토대왕비와 유사하다고 한다.

충주 고구려비(사진=문화재청)
충주 고구려비(사진=문화재청)

 

비문은 심하게 닳아서 앞면과 왼쪽 측면 일부만 해석가능한 상태다. 내용 가운데 처음에 고려대왕(高麗大王)’이라는 글자가 보이는데, 여기서 고려는 고구려를 말한다. ‘전부대사자(前部大使者)’·‘제위(諸位)’·‘사자(使者)’ 등 고구려 관직 이름과, 광개토대왕 비문에서와 같이 고모루성(古牟婁城)’등의 글자가 있다. 모인삼백(募人三百)’·‘신라토내(新羅土內)’ , 고구려가 신라를 칭했던 내용들이 쓰여 있는 것으로 고구려비임을 확인하였다.

 

비문 내용에 “5월중 고려대왕의 조왕이 신라 매금으로 하여금 서원을 하되 세세토록 형제와 같이 상하가 화목하고 하늘의 도리를 지키도록 하라고 영을 내렸다. ”라는 내용이 있는 것을 볼 때, 고구려가 영토 확장에만 치중한 것이 아니라 상생과 화합의 도리를 중요시하였음을 엿볼 수 있다.

충주 고구려비(사진=문화재청)
충주 고구려비(사진=문화재청)

 

201911월 한국 교통대학교 중원학연구소가 주관하고 발표한 충주 고구려비 발견40주년기념 학술대회자료에 따르면, [충주비]는 서채와 문체가 비록 한자로 쓰여졌으나 중국풍을 따른 것이 아닌 고구려의 독자적 기상을 나타냈다는 점을 높이 평가하였다. 고구려비에 대한 판독문은 학자들에 따라 약간의 견해차이가 있으나 4면 비로서, 1623, 2면은 1023, 3면은 723자 정도이다. 그러나 그 중 판독가능한 문자는 전면과 좌측면을 합해서 약 200여자 정도인 것으로 이해되었다.

충주 고구려비각(사진=문화재청)
충주 고구려비각(사진=문화재청)

 

또한 이 자료에서는 ‘[충주비][광개토대왕비]와 함께 한국 고대사뿐만 아니라 고대 동아시아의 여러 나라들에 대한 관계사를 연구하는데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이 같은 점에서 한··일 역사학계에 공동의 관심사가 되고 있으며, 비문 판독뿐만 아니라 비문에 들어있는 내용을 토대로 고구려사 중심으로 한국고대사의 역사상과 중국, 일본 등 주변국가와의 관계를 규명하는데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면서, ‘판독의 어려움으로 인하여 글자는 물론 내용확인이 어려운 부분이 상당수 존재하나 판독 가능한 글자들에 대한 상세한 분석과 재검토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하였다.

 

강인했던 국가의 기상으로 우뚝 서 있는 [충주 고구려비]는 우리민족의 자긍심을 느끼게 하는 역사적 기록유산이다. 또한 역사적으로 고구려와 백제, 신라 3국의 관계를 밝혀주는 소중한 자료로서, 국내에 유일하게 존재하는 고구려비라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매우 큰 가치를 지닌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