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再발견 - 사적 제229호 '예산 윤봉길 의사 유적'
상태바
문화再발견 - 사적 제229호 '예산 윤봉길 의사 유적'
  • 임영은 기자
  • 승인 2020.04.06 10:4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숨겨진 문화재의 가치를 재발견하고, 문화재를 국민과 함께 공유할 수 있는 생생한 문화재현장 스토리.
문화再발견 제113편 '예산 윤봉길 의사 유적', 문화재 재발견의 스케치

 

 

 

예산 윤봉길 의사 유적은 윤봉길의사가 태어나서 자란 곳으로 충남 예산군에 위치해 있습니다. 사적지에는 윤봉길 의사가 태어난 집과 성장한 집이 따로 있는데, 태어난 집은 광현당(光顯堂)이라 하며, 중국으로 망명하기 전까지의 집은 한국을 건져내는 집이라는 뜻의 저한당(狙韓堂)이라 불립니다.

 

윤봉길 의사는 새로운 문화의 습득에 주력하면서 농촌 계몽과 부흥에 힘썼습니다. 또한 야학회와 독서회를 조직해서 농촌의 문맹퇴치운동을 벌이기도 하였으며, 1929년에는 농촌발전을 위하여 월진회를 조직하였습니다. 

 

1932년 일본 국왕의 생일인 천장절과 상해전투승리 축하식을 겸한 기념식이 있었던 중국 상해의 홍구공원에서 폭탄을 던졌는데, 이것이 4·29의거였습니다. 윤봉길 의사는 바로 체포되어 사형을 언도받고 25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국가에서는 윤봉길 의사가 이룩한 업적을 기리기 위해 1965년에 기념탑을 세우고 1968년에는 충의사를 세웠습니다. 그 뒤를 이어 윤의사의 생가, 성장가 등이 복원되고 유물전시관과 농촌 계몽운동을 벌였던 부흥원이 세워진 것은 1970년 이후입니다.

 

충의사는 윤봉길 의사의 사당으로서 초상을 모시고 있으며, 그가 평소에 사용했던 유품들은 보물 제568호로 지정되어 현재 유물관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충의관을 세워 윤의사의 농촌 계몽운동과 4·29의거 장면을 그림으로 나타낸 11경도를 전시해 역사교육장으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매년 4월 29일에는 윤의사를 추모하는 매헌문화제가 열립니다. 1972년 사적 제229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예산 윤봉길 의사 유적은 짧은 생이었으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윤봉길 의사의 흔적이 남아있는 문화유산입니다.
이에 CPN문화유산에서는 예산 윤봉길 의사 유적의 문화재 보존관리 상황에 대해서 알아보는 소중한 시간을 가졌습니다.

 

CPN문화유산에서는 앞으로도 숨겨진 문화재의 가치를 재발견하고 문화재를 국민과 함께 공유할 수 있도록 생생한 문화재현장 스토리를 전달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취재팀 임영은

lzs0710@icpn.co.kr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