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공들의 마음의 안식처 , 정수사(淨水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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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공들의 마음의 안식처 , 정수사(淨水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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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9.06.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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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사(淨水寺)


고려청자 도공 "마음의 안식처"







전라남도 강진군 대구면 용운리 천개산(天蓋山)자락에 위치한 정수사라는 절이 있다. 정수사를 찾아 올라가면 천개산 자락의 연무와 회색빛깔의 채색이 산채와 어울어져 운치를 더해 준다. 공사가 한창 진행중에 있어 바닦은 온통 자갈이 깔려 바지락거리는 소리가 정수사에 울려 펴진다. 절을 찾는 이들에게 어서오라는 인사를 하는 것 같다. 천천히 한 발 한 발 내 딛을 때마다 마음은 평온을 찾아가는 느낌을 받는다.





▶정수사(淨水寺)


정수사 입구에 들어서면 정면으로 대웅전이 있다. 석가모니를 모시는 곳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인 맞배지붕(옆에서 볼 때 “人”자 모양)으로 되어 있다. 천장의 둘레에 평방위에서 공포(처마를 받치는 부재)까지의 공간을 사면인 판백으로 처리하고, 판백에 벽화를 그려 내부천장을 장식했다. 바닥은 마루판으로 된 우물마루(우물“井”자 형태)이며 후면 중앙 벽쪽으로 불단이 있다. 경내를 둘러 보다 이네 다시 한 번 눈과 마음를 이끄는 도조사를 볼 수 있다. 도조사는 고려시대 청자를 굽던 옛 도공들의 위패를 모셔놓았다.





▶고려청자 도공들의 위패


정수사(淨水寺)는 고려시대 9세기~14세기에 걸쳐 고려청자를 굽던 도공들이 청자를 굽기 전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고 좋은 청자를 만들 수 있도록 부처님께 공양과 불공을 드리던 곳 이였으며, 도공들의 어렵고 힘든 삶에 대한 고통을 이기기 위해, 가족의 건강을 위해 정수사를 찾았다고 정수사 주지 수현스님은 말한다.





▶정수사 주지 수현스님


정수사 주지 수현스님에 따르면 “고려시대 도공들이 한때는 대우도 받았겠지만 500년 세월동안 조정의 압력을 받아오면서 도공들은 숫한 서러움을 받았을 것이며, 이에 후손들에게 전승·계승 되지 않았던 것으로 본다.”며 정수사는 옛 도공들의 마음의 안식처라고 했다. 도조사 바로 앞에는 “혼불등”탑을 세워 도공들의 넋을 기리고 있다.





▶무명도공들의 위패를 모셔놓은 도조사


정수사(淨水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2교구 본사인 대흥사(大興寺)의 말사이다. 구군지(舊郡誌)에 의하면, 805년(애장왕 6)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창건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도선은 827년(흥덕왕 2) 영암(靈巖)에서 출생하였고, 842년 승려가 되었으므로 그 연대에는 다소의 착오가 있는 듯하다. 창건 당시에는 이곳의 계곡을 중심으로 양쪽 언덕에 묘적사(妙寂寺)와 쌍계사(雙溪寺)의 두 사찰을 건립 하였다.



쌍계사는 수정사(水淨寺)라 불렸으나, 1529년(중종 24) 중창하면서 정수사라 하였고, 1574년(선조 7) 성운(性雲)이 중건하였다. 그 뒤 정유재란으로 대파된 것을 1644년(인조 22)에 종인(宗印)이 현감 강유(姜諭)의 시주로 중건하였고, 1664년(현종 5)에는 능우(能佑)가 중수하였다. 1706년(숙종 32) 처사(處士) 이득종(李得宗)이 당시의 현감이었던 김중려(金重呂)의 협력을 얻어 중수하였고, 1794년(정조 18) 왕명으로 고금도(古今島)에 있는 관왕묘(關王廟)를 이 정수사에서 관리하게 되었다.



조선말까지만 하여도 강진 부도의 사암(寺庵)들을 관장하는 수찰(首刹)이었으나 차츰 퇴락하다가 6·25 이후 공비들에 의하여 소실되었으며, 뒤에 사찰 승려들이 지방민의 협조를 얻어 중건하였다. 1991년에는 요사를 지었고, 1995년에는 사사자석탑(四獅子石塔)을 조성하여 오늘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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