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茶 문화의 성지 ‘하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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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茶 문화의 성지 ‘하동’
  • 임영은 기자
  • 승인 2020.06.16 1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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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화 : 1,200년 동안 이어져 온 차의 성지
최초의 차 시배지로 알려진 하동 화개면 운수리 산127 (사진 = 하동군청)
최초의 차 시배지로 알려진 하동 화개면 운수리 산127 (사진 = 하동군청)

 

흔히 한국 차문화의 중심지를 물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보성’을 떠올린다. 자세한 사정을 들여다보면, 보성은 일제강점기시 일제가 조성한 차밭으로 약탈을 위해 지어진 기점이었다. 현재는 ‘녹차’를 활용하는 마케팅을 진행해 ‘보성 녹차’라는 이름 자체가 브랜드화를 성공시켰다.

 

원래 우리나라의 역사에서 차의 중심지는 바로 ‘경남 하동’이다. 차를 음용했다는 기록은 선덕여왕 때부터 있었다고 알려져 있으며, 차 시배지로 삼국사기의 기록에 828년 지리산 일대에 대렴공이 차씨를 들여와서 심었다라고 되어 있다. 삼국유사에서도 ‘경덕왕 충담사’조에 ‘전다(차를 달이다)’와 같은 내용이 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의 차문화는 불교가 국교인 고려시대에 들어오면서 더 꽃핀다. 특히 ‘매해 팔관회 행사가  이루어졌고, 그 때마다 차를 마시는 행사가 있었다.’ 는 고려사의 기록으로 보아 차문화가 크게 번성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 접어들면서 숭유억불 정책과 함께 차를 마시는 문화가 사치로 여겨지면서 크게 쇠퇴하게 된다. 그럼에도 하동을 비롯한 지리산 일대는 민가의 알음알음으로 전통의 ‘제다 비법’이 전해져 내려왔다. 

 

차를 우리는 다기 세트 (사진 = 하동 야생차박물관)
차를 우리는 다기 세트 (사진 = 하동 야생차박물관)

 

조선후기 실학의 영향으로 제다에 대해 재평가가 이루어지면서 ‘다산 정약용’과 ‘초의선사’ 등 차에 대해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늘어났다. 현재 차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대체로 조선후기에 기록되어 있는 것이 대부분으로 이에 대한 조사가 더 필요한 상황이다.

 

일제강점기에는 우리의 차문화가 상당히 파괴되었으며, 녹차를 강탈하기 위한 기지로 만들기 위해 보성에 차밭을 조성하는 등 본래의 문화와 상당히 다른 의도로 전승이 되어버렸다. 

 

1,200년 동안 하동에서 계속해서 민가 단위로 차를 만들어 왔지만, 해방된 후로는 망가진 차 문화와 어지러운 나라의 환경 속에서 대중화하기에는 힘든 상황이었다.

 

6.25 전쟁이 끝난 어느 날, 한 가족이 하동에 터를 잡는다. 바로 하동 덖음차의 대중화를 시작한 김복순 할머니와 그 가족이었다.

 

'제2화 : 하동의 차 문화를 부활시킨 김복순 할머니'로 계속됩니다.

 

취재팀 임영은

lzs0710@icp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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