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황평우 한국문화유산정책연구소 소장
상태바
[특별기고]황평우 한국문화유산정책연구소 소장
  • 관리자
  • 승인 2010.03.03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강은 살아있는 역사 · 문화다.


황평우(문화연대 문화유산위원회 위원장/한국문화유산정책연구소 소장)



Ⅰ. 강의 역사 문화적 의미


1. 강과 산은 그 자체가 우리 한반도의 역사·문화이다.


한반도에서 사람이 살기시작하기 전부터 강은 흘렀고, 강은 사람들이 강에 기대어 사는 것을 포용했으며 인간이 강을 헤치는 것조차도 묵묵히 담아내는 어머니이기도 했다. 긴 시간을 통해 보면 강 그 자체가 살아있는 역사요 문화다. 즉 4대강 살리기라는 말은 애당초 성립되지 않는다. 우리의 강 그 자체가 살아있는데 또 뭘 살리겠다는 것인가.

인류의 정착생활을 통한 문화의 시작은 땅과 물의 이용을 통한 식량 생산이었으며 나아가 잉여생산물은 인간이 모여 사는 취락의 형성과 발달에 지대한 역할을 했다.

한반도 주요 지역의 역사와 문화는 강이 주는 수리 기능과 그 유역을 이루고 있는 식량 생6산의 토대인 경작지가 배경이다.

강 주변은 인간 활동으로 행해지는 교통과 외적(外敵)으로부터의 방어 역할 및 자연환경요소가 주는 예술 창조 활동 등의 주민 생활공간이 어우러졌고, 문화적 삶의 형태를 총망라한 역사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다.

동서양 인류문명의 발상지에서 보듯이 물의 이용이 편리한 강변에서 취락 도시가 발달했고 이것은 강을 끼고 문화를 일으킨 문명권의 지리적 조건과 일치한다.



2. 우리나라 하천 지형의 특징과 선사시대



우리나라 하천의 특징은 충적평야, 범람원, 자연제방과 배후습지, 하안단구 등으로 설명할 수 있다. 고고학은 지형학의 원리를 이용하여 선사시대 인류생활의 입지와 조건을 연구한다. 하안단구나 선상지, 자연제방과 그 배후의 습지는 토양이 비옥하거나 홍수로 인한 범람을 피할 수 있는 이점으로 인해 원시·고대의 사람들이 일찍부터 생활의 터전으로 이용해왔다. 즉 충분한 조사를 한다면 하천은 문화와 역사의 보고이다.

신석기시대나 청동기시대의 대규모 취락과 농경지가 이러한 지형 조건을 배경으로 형성된 것은 당시 사람들의 지혜인 동시에 오랜 경험이 축적된 결과이다.

‘자연제방 위의 취락 - 배후 사면의 밭 - 배후습지 주변의 논’은 하천변의 지형을 최대한으로 이용한 좋은 예이다.

후기구석기시대에 해당되는 최종빙기에는 하천 주변에는 단구가 발달하였고 그 위에서 당시 사람들이 생활했다.

이후 기후가 따뜻해지고 해수면이 높아지면서 구석기시대유적 위에는 엄청난 양의 퇴적층이 형성되어 깊게 매몰되었다. 강변 충적지에서 발견되는 구석기시대 유적은 보통 5m내외의 깊이 또는 그 이하에서 발견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3. 역사시대의 강 (한강을 중심으로)



농경의 발달과 금속기의 사용은 생산력의 증가를 가져왔고, 부와 권력을 가진 계층이 등장하여 정치조직을 형성했다.

강 유역은 고대 국가들이 국력을 키워 영토를 확장시키면서 필연적으로 만나게 되었던 역사의 장이다.

한강 유역의 풍부한 수량과 범람으로 인한 비옥한 농토, 김포평야, 여주·이천평야, 평택평야 등 넓은 충적평야는 고구려·신라의 세력 확장과 유지에 따른 경제적 바탕지가 된다.

한강은 전국의 물산(物産)을 가장 효율적으로 집산(集散)할 수 있는 유리한 조건이며 고대 이후 전근대사회에서는 조운(漕運)·수운(水運)의 중심지이며 육로도 이와 연결되었다.


큰 물줄기로서의 한강은 외적 방어에 유리한 천연의 장애물이었으며 수동식 무기를 이용하던 전쟁에서는 관방(關防) 기능의 효용이 가장 뛰어난 자연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역사시대 한강의 역할은 농경을 통한 경제적 안정, 군사방어의 효용성 제고, 문화의 수용과 전파, 물자교류와 외교통상의 확대 등에 기여. 삼국은 위의 여러 조건을 통틀어 정치적 통일을 꾀하고 강력한 영역국가를 완성하고자 한강 유역의 확보를 위하여 필사적으로 쟁패전을 벌였다.

고구려는 평양으로 도읍을 옮기면서 남진정책(南進政策)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여 한강 유역으로의 진출했으며 신라는 낙동강 유역을 장악하고 백두대간을 넘어 남한강을 따라 진출했다. 백제는 경기 ·충청·전라·강원 일부를 영토로 하는 영역국가로 성장하였지만, 한강 유역으로 진출하고자 하는 고구려와 신라의 팽창세력과 충돌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백제는 한강 유역의 지리적 여건과 철기농경문화의 높은 생산력을 바탕으로 급속한 발전을 했다.

한강 유역의 획득은 삼국의 흥망성쇠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고 한강 유역은 한국 민족사에 있어서 최종 통합세력을 출산·유지하는 역사의 중심무대가 되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한강유역은 삼국시대 백제, 고구려, 신라가 치열한 격전을 벌였던 장소이다. 고대왕국 체제가 정비되는 시기에 영토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한강처럼 큰 강은 세력을 구축하는데 유리한 조건을 제공할 수 있었다. 또한 한반도에 삼국 체제가 자리를 잡아가는 시기는 중국 및 일본과의 교류의 중요성이 날로 높아가고 있었던 때여서 한강의 지정학적 수운을 이용하여 중국 및 일본과 교류에 유리한 위치를 가질 수 있었다. 삼국 가운데 제일 먼저 한강유역을 차지했던 나라는 백제였다. 일찍이 교역활동을 통해 주변 정세에 밝았던 백제는 동진과 교류를 한 370년을 전후로 통치체제를 정비하고 왕위계승원척을 부자 상속의 형태로 변화시키며 왕권을 날로 강화시킨다. 이 일대에 자리를 잡은 백제는 남으로 마한의 영산강 유역은 문화적인 면에서 남북문화권의 경계지이고 중국문화와의 접촉지로서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이러한 한강은 통일신라 말기에 태봉(泰封)이 일어나고 이어 고려가 개경을 수도로 하여 후삼국을 통일하였는데, 특히 한강유역의 호족세력들이 고려의 중심세력화 되면서 한강유역은 다시 역사의 중심지로 등장하게 된다. 특히 고려 말에 이르러 몽고의 침입과 고려 말 왜구의 잦은 침략으로 국난타계를 위한 풍수지리설이 성행하면서 한강유역인 남경이 크게 주목받았고 천도론(遷道論)이 대두되기도 하였다.


고려의 건국과 후삼국의 통일은 왕건 세력이 한강 유역의 유리한 지역을 차지하였다는 지정학적 기반에 힘입었다.

고려시대 서울 지방은 국초에는 양주, 문종 이후 충렬왕 때까지는 남경(南京), 충선왕 이후 고려 말까지는 한양(漢陽). 983년 전국에 12목(牧)이 설치되면서 한강 유역 이북은 양주목(楊洲牧), 이남은 광주목(廣州牧)이 관할했다. 한강이 수송로적 가치를 인정받게 된 계기는 고려조정의 수운제. 고려 초 12개의 조창 덕흥창(충주), 소양창(춘천) 등이며 이로 인해 조선시대 내륙항인(나루터) 마포, 뚝섬, 여주, 목계, 충주 등이 번창했다.


한강 유역이 지금과 같이 중요한 관심의 대상이 된 것은 조선의 개국과 함께 태조가 한양을 왕조의 도읍지로 삼은 이후부터이다. 한강을 끼고 있는 한양의 인문 지리적(人文地理的) 위치의 중요성이 강조되었다. 즉 한강을 끼고 있는 한양의 지리적 위치가 한반도의 중심에 위치하여 지세가 훌륭하여 생업의 터전으로 적당하고, 수륙교통이 편리하며, 군사적 요충으로서의 좋은 조건을 간직하고 있다는 점이 도읍지로서 부각된 것이다.

북악 아래 자리 잡은 경복궁을 비롯한 창덕궁·창경궁·경희궁·경운궁의 5대 궁궐이나 종묘·사직단·도성·관아·원구단·성균관 등 국가를 상징하는 모든 시설물들은 바로 한강을 토대로 이루어진 상부 구조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한성(漢城)은 풍수 지리적으로 삼각산(북한산)을 진산(鎭山, 또는 祖山)으로 하고, 북악을 주산(主山)으로 하며, 낙산(낙타산, 타락산)을 좌청룡(左靑龍), 인왕산을 우백호(右白虎), 목멱산(남산)을 안산(案山)으로, 개천(청계천)을 내명당수(內明堂水)로 하였으며, 한강을 외명당수(外明堂水)로 하여 그 남쪽에 조산(朝山)인 관악산을 두었다.


1394년 한양으로 천도한 이후 500여 년 동안 한양을 끼고도는 한강은 풍부한 수량과 발달된 지류로 하류에 곡창지대를 만들었고 육상교통이 발달하지 못했던 시대에 조운과 물길로 이용되면서 크게 발달하여 경제 문화적으로 큰 역할을 하게 된다.

전근대사회에 있어서 국가재정의 운용을 위한 수입은 거의 농업 생산물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국가 통치를 위해서 농업경제가 사회 하부토대를 이루고 있는 상태에서는 농산물을 현물조세(現物租稅)로 수취하여, 중앙권력기관 곧 왕궁과 관아가 있는 곳으로 운반하여야 했다.

따라서 세곡(稅穀)의 운송은 국가적으로 중대사의 하나였으며, 육상교통이 발달하지 않았던 까닭에 바닷길과 내수로(內水路)를 이용한 조운(漕運)에 의해 대량의 조세가 수송되었다.

그러므로 도읍지로서의 위치는 나라의 중앙에 위치하고 수륙교통이 편리한 곳이 주목되었으며, 한강을 끼고 있는 한양은 바로 이러한 곳에 해당된다.


한강의 수운과 육로를 통해 모여든 전국의 산물은 다시 같은 경로를 통해 전국의 상권으로 흩어져 나감으로서 조선시대의 한강은 상업과 공업의 중심으로 한양의 구조가 재편성되는 기반을 제공하게 된다. 전국적인 조세체계가 강화되면서 조선 팔도의 사람과 산물이 한양으로 집중되고, 공물이 대량으로 운반되어 한양은 정치와 경제생활, 그리고 사회와 문화생활의 중심지로 성장하였다. 한편, 국가에서 제사를 올리는 제단들이 경강의 곳곳에 설치되는가 하면 전국의 물자들을 종류에 따라 저장하는 광흥창, 풍저창, 별창 등의 대규모의 창고가 건립, 유지되었다. 이처럼 조선후기는 한강의 전성시대였다.

조선시대 한강의 여러 기능 가운데 가장 중요시되었던 것은 세금으로 징수한 미곡, 포백 등을 수상 운송하는 조운로(漕運路)로서의 역할이었다. 고려 초 성종 때 제도화된 조운제도는 조선시대에 이르러 본격화되었다. 각 군현에서 거두어들인 조세미를 인근의 강가나 해안의 조창(漕倉), 수참(水站)에 쌓아 두었다가 이를 수로를 이용하여 한양으로 운송하였다. 한강 상류 경상도, 강원도, 충청도와 경기로의 조세가 모여서 용산 강안에 있는 강창(江倉)에 집결되었고, 하류로부터는 황해도에서부터 충청도, 전라도의 조운이 모여 서강(西江)에 연안의 강창에 보관하였다.



Ⅱ. 4대강 사업으로 훼손되는 역사와 문화



1. 학문(역사학. 고고학)을 권력의 시녀로 전락시켰다.


MB정부가 애당초 한반도운하를 추진하면서 환경과 경제적 가치 창출 논란을 벌이다가 한반도운하가 시작되면 역사문화유산이 파괴된다는 시민사회의 강력한 문제제기에 있었고 결국 포기하기에 이른다. 이후 MB정부는 한반도운하의 변종인 4대강 살리기 사업을 들고 나온다. 한반도 운하포기의 결정적 계기였던 역사문화 파괴에 대응한다는 것이 4대강 주변의 역사문화유적에 대해 조사한다는 것인데 4대강 관련 문화재 지표조사를 실시한 23개 기관 모두 무허가기관 해당되는 웃지 못 할 사건이 벌어졌다.

즉 국토해양부가 4대강 살리기 사업과 관련하여 실시한 지표조사지역은 문화재보호법 시행규칙 제53조(문화재 지표조사)에 의거하면 문화재조사 지역에 해당되며 문화재지표조사를 실시함에 수중조사를 반드시 조사해야 하는 지역이다. 문화재보호법 시행규칙 제80조에 의하면 문화재관련 전문기관은 육상지표조사기관과 수상지표조사시관으로 구분된다. 그러나 4대강 살리기 사업 지표조사 참여 23개 기관은 모두 수중지표조사 허가를 받지 못하였기 때문에 무허가기관으로 밖에 볼 수 없으며, 따라서 국토해양부에서 주장하고 있는 문화재 조사는 원천 무효이다. 만약 이번 지표조사를 바탕으로 면피를 한다면 국토해양부장관은 문화재보호법 111조 4항 “문화재 지표조사를 정당한 사유 없이 거부, 방해 또는 기피한 자”에 해당된다.


또한 문화재보호법 시행령 [별표 15의 2], [바. 수자원의 개발] “건설공사의 시행자는 그 건설공사의 사업계획 수립 시 해당 공사 지역에 대한 유적의 매장과 분포 여부를 확인하기 위하여 문화재 지표조사를 실시하여야 한다.” 그러나 이번 4대강 살리기 사업 관련 지표조사는 정확한 사업계획과 설계구간이 수립되기 이전인 2009년 2월부터 3월에 걸쳐 실시되었기 때문에 법률로 인정받는 문화재 지표조사가 아니다. 따라서 재실시해야 한다. 기존 지표조사라고 하는 조사는 인공재방에서 50m 이기 때문에 사업계획지의 반경에 있는 모든 지역에 문화재조사를 실시하고, 전 지역에 영향평가를 실시해야 한다.

전체 조사면적 291.3백만㎡에 달하는 지역을 각 권역별로 나뉘어 23개 기관에서 1달 반 만에 육안 조사하였다. 이는 졸속조사이기 때문에 인정할 수 없다. 또한 자문위원 중 일부는 공무원(국립박물관, 문화재청)이 포함되어 있어 진정성에 의문이 간다.

문화재위원회는 3월과 5월, 단 2차례 개최하여 심의했다는 것은 부실심의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위 사항들에 의거한 문화재조사는 원천적으로 무효이며 고고학과 역사학의 학문을 토목과 정치권력의 시녀로 전락시키고 역사문화를 천박한 토건세력을 위한 도구화 했다는 점에서 한국 역사문화계에 커다한 오점으로 남을 것이다.


우스갯소리로 우리나라는 땅만 파면 유물이 나온다고한다. 그만큼 역사적·문화적으로 인류의 활동이 왕성했다는 증거이다.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은 발굴을 가장해서 귀중한 우리 유물을 도굴해갔다. 일본인들은 조선 사람들이 발굴현장에 접근하는 것을 막았다. 해방 후 우리 스스로 발굴을 못해 다시 일본인을 불러서 배웠던 암울한 시절이 있었고, 무령왕릉에서 큰 실수를 했고 이후 한국의 고고학은 양적으로 질적으로 성장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질적인 성장에 대해서 자신 있게 말 할 수 있는 단계는 아니라고 본다. 한국의 발굴역사는 학문적 요구보다는 마구잡이식 난개발의 부수입에 불과하다.

엄격하게 말하면 땅속에 있는 유물은 그대로 두는 것이 최고의 보존방법이다. 몇 천 년, 몇 백 년 동안 땅속에서 안정화 되어있는 유물을 갑자기 다른 환경에 노출시키면 유물이 훼손되기 때문이며 발굴기술이 향상된 후에 해도 늦지 않다는 역사와 문화에 대해 겸손해야한다는 것을 상징한다.

그렇다면 발굴과 도굴의 차이는 무엇인가? 유물을 훼손한다는 의미에서 도굴과 발굴은 같다. 다만 발굴은 규정과 학문적 공공성을 바탕으로 행해지기에 그 정당성이 있는 것이다.

결국 땅속에 있는 매장문화재는 손대지 않는 것이 가장 훌륭한 문화재보존 방법이다.


2. 4대강 사업으로 훼손되는 문화유산의 실상



한강과 낙동강 및 우리나라 4대강에는 문화재가 분포할 가능성은 매우 높다. 청계천 발굴 당시에도 많은 사람들이 문화유적이 없을 것으로 단정했다. 그러나 청계천 바닥에서 조선시대 건축물(교각, 교대 유적), 엽전, 각종 생활 유적, 토기 등 조선시대의 각종 문화재가 쏟아졌다.

우리의 강에는 초등학교 교과서부터 대학교재까지 기술되어 있는 수천수만 년 동안 켜켜이 퇴적되어 있는 선사유적(구석기, 신석기, 청동기유적)이 존재한다. 그리고 역사시대에는 주요 교통로였던 강줄기를 따라 수로를 확보하기 위한 토목공사의 기법들이나 방어를 위한 성곽 및 진지와 고분군, 승병들이 거주했던 사찰터, 사찰의 주요 문화재, 강을 따라 형성되었던 역사문화유적과 생활문화유적(목계장터 및 나루터 등)들이 존재한다.


문화재청이 공개한 내역에 따르면 4대강 사업 예정지 주변에는 문화재가 총 243점이 있다. 이 중 지정문화재가 94개, 매장돼 있는 문화재가 149개다. 강과 맞닿은 연접 지역의 문화재도 65개로 파악된다고 하고 있으며 형식적으로 시작한 문화재지표조사(육안조사) 결과 1400 여 곳의 문화재분포지역이 확인되었다.

이러한 문화재 분포지역은 모두 문화재 조사를 해야 한다. 그런데 문화재를 보존해야 할 문화재청(정부)은 오히려 빨리 문화재조사를 마치라고 강요를 하고 있으며 매장문화재가 있을 곳은 피해가고 없을 곳만 파헤치며 문화재조사 끝났다고 호들갑이다.


또한 종교유적의 경우는 수행경관까지 문화재영향권에 포함하여 피해사실에 대한 조사가 실시되어야하지만 현재는 아무런 조사와 대책이 없어 수행경관은 모두 훼손되기에 이르렀다.


아울러 강 주변의 삶에 대한 기억과 전통놀이와 관련된 무형의 문화유산과 마을마다의 전통적 행사는 파악도 못했고, 천연기념물 역시 나무 종류만 파악되었고 조류와 어류, 동식물은 조사도 하지 않고 있어 훼손과 파괴는 불을 보듯 뻔 한 일이다.

결국 잘못된 인간의 탐욕으로 강과 더불어 살아오고 살아갈 무수한 다른 생명들이 사라지게 된다.

특히 4대강 사업이 시작되면 영향을 받게 될 대표적 문화유적을 살펴보면 보가 설치돼 수위가 상승할 경우 직접적으로 문화재가 훼손되거나 주변 경관이 변해 유적으로서의 가치가 떨어질 가능성이 있는 것들이다. 유적지로 분류되지 않는 보의 경우도 문제다. 보는 대개 암반 사이에 설치되는데 이 암반이 기암괴석 등 명승지로서의 가치를 지닐 수 있기 때문이다.

한강 유역에는 유네스코에도 등록돼 있는 영릉(사적 제195호)이 있다. 문화재청은 여주보가 능 뒤쪽에 설치될 예정이어서 전체 경관에 미치는 영향은 거의 없다고 밝혔지만, 문화재 훼손 여부의 문제에 있어 앞뒤의 문제는 아니다. 즉 앞에서 문제가 되는데 뒤는 관계없다는 논리는 이치에 맞지 않다. 유네스코도 최근에 유적지 자체 못지않게 문화 경관을 중요시하는 편이다.

광주미사리선사유적(사적 제269호)과 신륵사(보물 제180호)도 물이 지반으로 침투하면 유적지의 보존에 영향을 줄 가능성이 있으며 특히 신륵사는 종교수행경관에 엄청난 피해를 입게 된다. 습기와 안개는 신륵사의 목조와 석조문화재에 결정적 피해를 입히게 될 것이다.

남한강 유역에 있는 통일신라시대 유적인 중원탑평리7층 석탑(국보 제6호)은 이미 훼손 상태가 심각하기 때문에 조금만 변화가 있어도 피해가 예상된다.


낙동강 유역의 도동서원(대구 달성군 사적 제488호)과 병산서원은 조선시대 서원건축의 백미로 꼽히는 유적지다. 수중보가 준설될 경우 인근 강물의 오염이 염려되는 지역에 자리 잡고 있어 서원의 환경 보존 역시 장담하지 못한다.


금강 유역의 공산성(사적 제12호) 역시 공주보가 설치되면 수위 상승으로 성벽과 전각에 영향을 끼칠 위험이 있다. 백제의 국찰로 이름난 왕흥사지(사적 제427호)는 입구 가에 인접해 있기 때문에 물이 지층에 침투되면 제 모습을 지키기 어렵다.



Ⅲ. 대안과 의미



유네스코는 1972년 세계유산보호협약을 통해 인류의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지닌 인류의 문화 및 자연유산보호에 나섰으며, 자연과 문화유산을 이분법적으로 나누었던 것을 통합하는 의미 있는 국제협약이었다. 그리고 1992년, 세계유산위원회(WHC) 제16차 총회에서 문화경관이 가지고 있는 결합적 가치, 주민과의 관계, 그리고 생물다양성 보호와 연계해서 새롭게 인식할 필요가 있음을 확인한다.

인류의 탁월한 유산 가치를 보호하기 위해서 자연, 문화의 이분법을 탈피하는 보다 더 적극적 사고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즉 “문화경관 cultural landscape” 개념을 도입하고 이에 따른 실무지침서를 개정하기에 이른다.


이 지침서는 제10항에서 문화경관을 3가지 유형으로 구성하고 이 항목에 부합돼는 유산 중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지닌 유산을 세계유산으로 등재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첫째, 인공조성 경관(Clearly defined landscape): 정원, 공원 등으로 심미적 가치 보유(종교적 목적 혹은 주변 인공건조물과 연계).

둘째, 진화 경관(Organically evolved landscape): 사회, 경제, 정치, 종교적 함축된 의미를 지니면서 자연환경과 결합되거나 반응하여 발전된 경관.

셋째, 결합적 경관(Associative landscape): 주로 자연환경에 반응한 문화적 결합체를 말하며 세계유산협약은 크게 3가지, 즉 문화유산, 자연유산, 혼합 유산으로 분류하고 “문화경관”을 위의 유산 중 문화유산의 카테고리로 포함시켰다.


1992년 실무지침서의 개정이후, 2003년까지 30여개의 문화경관이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그러나 이전에 등재된 유산을 포함하고 문화경관 개념을 넓게 감안한다면 이미 등재된 유산 중 약 100여점(유럽 66, 아·태 21, 라틴 5, 아랍 3, 아프리카 5점) 가량이 문화경관 범주로 분류될 수 있다.


한국의 경우 세계유산등재 점수는 모두 7점이나 불국사·석굴암을 제외하면 사람이 살고 있지 않는 사적과 기념물이 주를 이루고 있다. 이미 아·태지역에서 역사 마을, 민속마을, 문화경관에 속하는 유산들이 세계유산으로 인정되는 등 새로운 유산개념의 국제적 이해가 전반적으로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우리의 강 주변에는 유네스코가 인정할 만한 역사마을, 민속마을, 문화경관에 속하는 지역이 대부분이다. 이는 우리나라 웬만한 지자체가 각 지역의 문화와 자연유산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하려는 움직임을 보면 알 수 있다.


따라서 4대강 난개발로 인해 한반도의 “문화경관”훼손은 불 보듯 뻔 한 일이다.

이제 한국도 인간과 역사 · 문화 · 자연환경간의 교호작용을 중시할 필요가 있으며 이를 통한 다양성 보전에 역점을 두며, “지속가능성”이라는 개념을 도입할 필요가 있다.

환경개선은 주민들의 삶이 중심이 되고 주역이 되는 “살아있는 유산(living heritage)”개념이 존중되어야한다.


오랜 기간 동안 지역주민들에 의해 시행되어온 전통적 토지사용 형태를 존중하고 마을과 도시 역사속의 정신적, 영적 의미, 상징성 등 무형적 가치들이 환경개선개념 형성에 반영될 수 있는 문화경관 개념이 주체가 되고 미래를 내다보는 입법과 정책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살아오고 살아온 강의 역사와 문화를 죽이는 4대강 사업의 즉각적인 중단이 선행되어야한다.


* 본 원고는 외부 기고문으로 본 언론사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