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보훈처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2004년도 12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예산결산위원장으로 선임되어 국내외에서 군자금 모집 활동 중 체포되어 옥중 순국하신 오의선(吳義善)선생을 선정·발표했다. 선생은 1889년 경기도 용인에서 태어났으며, 1919년 2월 일본 명치대학에 재학 중 동경유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선포한 2·8독립선언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후 임정에 투신할 것을 결심하고 상해로 갔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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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1919년 5월 2일 제4회 회의에서는 임시의정원 의장이 재정문제 타결을 위한 의견을 타진할 때 그는 대표의원 홍 진(洪鎭;震) 김동형(金東瀅) 박용각(朴容珏) 장도정(張道政) 이원익(李元益) 손두환(孫斗煥) 조 정(趙檉) 등과 같이 내외 공채(公債)의 발부, 의연금 수합, 세금의 징수 등을 그 주요 재원으로 확보하여 운영케 하되, 불복하는 경우가 있더라도 강제규정을 두자고 강경발언을 서슴치 않았다. 이후 1921년 북경으로 옮겨가 무장투쟁론자인 박용만(朴容萬) 계열의 인물들과 함께 활동하면서 서북간도 및 노령지역의 무장독립운동세력의 통일에 노력하고, 군자금 모집활동을 벌였다. 이에 따라 경북 안동에서 군자금을 모집하던 최윤동(崔胤東)이 일본 경찰 갑비(甲斐)를 총살한 의거활동의 관계자로 지목되기도 했다. 국내로 잠입한 뒤 시대일보 기자로 활동하면서 새로운 민족혁명 이념으로 전파된 사회주의에 공감하여 사회주의운동가로 변신했으며, 투옥된 동지들과 그 가족들을 돌보기 위해 국제혁명자후원회에 가입·활동했다. 선생은 1931년 3월 향리인 용인에서 일경에 피체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심한 고문으로 같은 해 5월 6일 옥중에서 42살의 나이로 순국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1980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 |||
12월의 문화인물에는 시인 박두진이 선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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