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산 왕궁리는 백제왕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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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 왕궁리는 백제왕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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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4.12.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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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시 왕궁리는 백제 무왕의 고향이었다.

자신의 고향으로 왕도를 옮기기 위해 익산에 왕궁평성을 짓고 제석사라는 절을 세운다.

그러나 자신의 천도계획은 실패하고 아들인 의자왕은 무왕의 업적을 등에 업고 즉위 초기 강력한 왕권을 형성한다.


지금까지 일반적으로 알려졌던 무왕의 기록들이다. 그러나 설만 무성할 뿐 정확한 궁의 위치는 알려지지
않았고 다만 ‘왕궁리’ 라는 지명에 의해 오층탑있는 곳이 아닐까 추측 할 뿐이었다.







이러한 추측은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소장 김용민)에서 10여년간의
발굴로 인해 실제 있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왕궁리유적 발굴조사로 백제시대 왕궁성 관련시설인 석축과 정원석, 건물지 등과 왕궁사(王宮寺)명 기와 및 각종 토기류,
금귀공품, 중국청자편 등 관련 자료를 비롯하여 고대 궁성의 구조와 변천과정 연구에 도움이 되는 고고자료와 1,000여점의
유물을 수습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왕궁리유적은 백제 30대 무왕(A.D. 600~641년)의 익산지역
경영계획에 의해 조성된 고대의 궁성(宮城)유적으로 남북길이 490m, 동서너비 240여m에 이르는 장방형 성벽으로 구획되어
있다.

한편, 서북편지역에 대한 정밀조사에서는 동서로 길게 설치된 석축배수로와 서성벽 아래로
이어진 암거시설이 양호한 상태로 확인되었고, 백제시대의 화장실로 파악되는 대형수혈(竪穴)도 모두 3기가 조사되었다.







수혈은 길이 10m내외, 너비 1.8m내외, 깊이 3.4m정도의
깊은 구덩이를 파내고 내부에 직경 10cm전후의 나무기둥을 일정한 간격으로 설치하였는데, 이중 1호 수혈내에서는 다량의
기생충란(회충,편충,간흡충 등)이 토양분석 결과 확인되었으며, 용변 후 뒤처리시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길이 20cm내외의
나무막대가 50여점 출토되어 고대(古代)의 화장실일 가능성을 높여주고 있다.

이번 발굴은 백제무왕에 의해 조성된 왕궁을 찾았다는 큰 성과와 함께 화장실이 발견되어 당시 사람들의 생활을 유추해
볼 수 있다는 것에 의의를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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