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지암은 해남 대둔사(대흥사) 본당 남쪽 가파른 산길 1킬로 위쪽, 두륜산 동쪽 꼭대기에 위치하고 있다. 차성(茶聖) 초의(草衣, 1786~1866)선사가 39세인 1824년에 띠집을 지어 40 여년간 주석한 한국 차문화 중흥의 상징인 곳이다. “뱁새는 항상 한 마음으로 살기 때문에 나무 한가지에만 있어도 편하다”는 한산시(寒山詩)의 일지(一枝)를 따 ‘일지암’(一枝菴)이라 부른다. 일지암을 정립한 초의선사는 대흥사의 13대 종사 중 한 분으로 1786년 4월 5일 전남 무안군 삼향면에서 태어나 운흥사 벽봉민성(碧峰敏性)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여 대흥사 완호(琓虎)스님께 구족계를 받고 법맥을 이었으며 초의라는 법호를 받았다. 뛰어난 대종사로 불교 중흥에 이바지 하였으며 선과 교, 유교와 도교 등 제반 학문에 조예가 깊고 범서에도 능통하고 범패와 시, 서, 화에 뛰어났다. 특히 다선일미(茶禪一味) 사상에 심취하여 <다신전>을 초록하고 차를 통한 다선삼매를 그대로 실천하였던 차인이다. | |||
| |||
40 여년의 시간 동안, 초의선사는 구름과 달을 벗 삼아 차를 다리며 시를 읊고, 당대 최고의 석학자들과(추사 김정희, 다산 정약용) 차와 선을 논하며 끊임없이 차향을 피우곤 했다. 일지암은 1866년 스님이 입적하자 깊은 소나무 숲 환경 때문인지, 차츰 사람의 발길이 끊어져 폐허가 되었다. | |||
| |||
가 비교적 상세히 그려져 이를 의거하여 일지암 터를 찾기 시작했다. 명원 김미희 선생은 일지암 복원터를 찾기 위해 버선발로 오르다 김봉호 선생이 업고 오르셨다는 것은 원로 다인들 사이에 미담으로 전해오고 있다. 또한 박종한 선생은 90이 넘은 응송스님을 업고 다니며 일지암 터를 확인해야만 했다. 그러므로 간혹 회자되고 있는 용운스님과 여연스님의 일지암 복원설은 와전된 것이며, 두 스님들은 일지암의 복원이 끝난 후부터 상주했다.
저작권자 © cpn문화유산 문화재TV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