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문화유산 - 화엄석경, 천년의 역사를 새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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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문화유산 - 화엄석경, 천년의 역사를 새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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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8.10.17 1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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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N문화유산에서 제작한 '화엄사 소장 화엄석경 홍보 영상물입니다.)

단단한 돌에 새긴 부처의 정신.
그 장엄한 역사의 보고.

위대한 유산, 화엄석경.
천 년의 비밀을 밝히다

지혜 지, 다를 이.
산에 오르면 지혜의 다름을 깨우치게 된다는 깨달음의 명산, 지리산.
지리산 자락에 위치한 화엄사는 1500년의 유구한 역사와 수많은 문화유산을 보유하고 있는
한국불교문화의 중요 사찰이다.

긴 역사만큼이나 수많은 문화유산을 보유하고 있는 화엄사.
아름다운 모양의 석등을 자랑하는 국보 제 35호 사사자삼층석탑은
불국사의 다보탑과 더불어 이형석탑의 쌍벽을 이루고 있는 우리나라 대표 석탑이다.

이 밖에도 수많은 국보와 보물, 지방문화재들을 보유하고 있는데..
이 중에서도 우리가 주목할 만한 문화유산은 따로 있다.
바로, 보물 제 1040호.(천 사십 호)
천 년의 베일에 싸인 화엄석경이다.

화엄석경은 화엄경을 돌에 새긴 것으로 창림사의 법화석경, 칠불암의 금강석경과 함께
통일신라시대의 유물로 알려져 있다. 안타깝게도 지금은 파편으로 남아 있지만,
현재 남아 있는 몇 안 되는 8세기 석조 기록물로서 그 가치가 크다.

가느다란 선으로 화려하게 그려 넣은 변상도 그리고 동형반복을 피해 새긴 글자들이
눈에 띈다. 실제로 화엄석경을 살펴보면, 단순히 불경 보존의 목적 뿐만 아니라
심미적인 부분까지 신경 썼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파편으로 남은 화엄석경의 원본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국보 제67호 각황전. 이곳 각황전 터에는 의상법사가 670년에 건립했다는
장육전이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임진왜란 때 불타버렸다.
지금의 각황전은 1702년에 숙종이 각황전이라는 현판을 내려 다시 세워졌다고 한다.
화엄석경은 각황전의 전신인 장육전에 장엄되었다고 전해진다.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화엄석경을 제대로 수습하게 된 것은 1960년대.
그 뒤로 무려 60여년이 흘렀지만, (여전히 화엄석경의 진짜 모습은 오리무중이다.)
누가, 어떻게 만들었는지, 제작시기는 언제인지,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화엄석경은 그저 파편들로 화엄사를 비롯한 여러 곳에 잠들어있는 실정이다.

우리는 화엄석경의 실체에 한발짝 다가가고 싶었다.

기계가 없던 통일신라시대에 60(육십)권본의 석경을 작업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40여년의 내공을 가지고 있는 장인에게 부탁해 화엄석경을 재현해보기로 했다.
한 땀 한 땀 글자를 새기는 장인의 섬세한 손끝에서 우리는 신라시대 석공들의 정성과
노력을 떠올릴 수 있었다.
장인이 화엄석경 여섯자를 새기는 데 소요된 시간은 약 한시간 이십여 분이다.
화엄석경 육십권본의 전체 글자는 497,451자.(사십 구만 칠천 사백 오십 일자)
이를 환산하면 화엄석경 60권본을 새기는데 대략 일만 이천 사백여 시간이 소요된다.

도구가 발달하지 않은 과거에 이 많은 석경을 손으로 새기기 위해선 얼마나 많은 시간과
정성이 필요했을까....

우리는 취재 중, 화엄석경에 대해 기존에 알려진 것과 다른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신라시대 명필 김생체 또는 구양순체로 알려졌던 화엄석경의 서체가 실제로는 사경체와
더 가깝다는 것이다.

실제로 화엄석경의 조성시기는 8세기에서 9세기로 학자들마다 이견이 있다.
조위원은 화엄석경의 서풍과 각법에 대한 연구를 통해 조성시기를 유추할 수 몇가지
근거를 찾아냈다고 한다.

우리는 화엄석경과 장육전의 관계에 대해서도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화엄석경이 단순한 장엄을 위한 것이 아닌 장육전의 건축부재로 사용됐다는 것이다.

화엄석경이 장육전 벽면의 건축부재였다는 주장은 사실일까.
연구가 부족한 상황이기에 가설로 남아있지만, 우리는 촬영했던 화엄석경의 파편들에서 동일한 모양의 구멍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석경에 남아있는 일자 모양의 홈과 기역자 모양의 홈이 바로 그것이다. 실제로 꽤 많은 석경에서 이러한 형태를 볼 수 있었다.

흔히 화엄석경과 가장 유사한 것으로 중국의 방산석경을 꼽는다.
방산석경은 동굴 벽면을 장식하는 형태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석굴사원의 벽체를 석체로 조성한 중국의 방산석경과 화엄석경은 완전히
다른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의견이다.

화엄석경은 위쪽 구멍에 나무를 끼워 벽면에 고정하고,
위, 아래 네모난 홈과 측면 홈에 나무를 맞춰 연결하는 방식으로 벽체를 이뤘을 것으로 추측된
다.

안타까운 것은 화엄석경에 관한 자료들이 대부분 가설에 근거한다는 것이다.
외세의 침략에 의해 소실되었던 화엄석경을 다시 수습한지 60여 년.
이제는 그 비밀을 풀 때가 되지 않았을까.

(2018년 6월, 화엄석경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드디어 첫발을 떼었다)
그러던 중, 우리에게 반가운 소식이 들렸다. 화엄석경에 대한 연구가 이제 막 첫발을 떼기
시작했다는 소식이다.
수많은 학자들이 모여 화엄석경에 대한 의견을 나누는 자리.
지나온 역사가 긴 만큼 다양한 가설과 연구결과들이 공유되고 있다.
아직은 방대한 파편을 연구할 인력과 자원이 부족한 상황이지만
소중한 문화유산의 올바른 복원을 위해 묵묵히 한걸음씩 나아가고 있다.

석판 600여개, 17, 776행, 총 497,451자.
(석판 육백여 개, 만 칠천 칠백 칠십 육 행, 총 사십 구만 칠천 사백 오십 일 자)
화엄석경을 나타내는 수치는 헤아릴 수 있으나,
그 안에 담긴 수많은 이야기와 가치는 헤아릴 수가 없다.

화엄석경에 새겨진 홈은 단순한 글자가 아니다.
그것은 땀과 정성으로 만들어낸 우리 민족의 혼이 담긴 기록이자 역사이다.

“고종의 훈유 중”
경은 그 나라에 가면 그 나라와 친목과 화호를 도모하는 데 힘쓸 것이며,
일을 논의할 때 모가 나지 않도록 하여 타협을 이룩토록 하고,
또한 그 나라에 주차하고 있는 중국 및 각국 공사·영사들과도 친밀히 교제하고,
또 각국의 사정을 자세히 탐문하여 일일이 보고를 올리도록 하라.
이것이 짐이 바라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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