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PN 뉴스 - 2천만 동포가 하나 된 국채보상운동, 112주년 기념식 개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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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N 뉴스 - 2천만 동포가 하나 된 국채보상운동, 112주년 기념식 개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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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9.02.20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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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국채보상운동기록물>▲(사진=문화재청)


21일 오후 2시 대구 엑스코 오디토리움에서 열러
구한말 최대의 민족운동, 자주독립정신 기려


국가보훈처(처장 피우진)는 20일, 국채보상운동을 기념하는 「제112주년 국채보상운동 기념식」이 21일(목) 오후 2시 대구 엑스코 오디토리움에서 (사)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상임대표 신동학) 주관으로 열린다고 밝혔다.

국채보상운동은 1904년 일제의 고문정치가 시작되면서 도입한 차관으로 경제가 파탄에 이르자, 1907년 대구에서 서상돈, 김광제 선생 등이 중심이 되어 의연금을 모아 일본에 진 빚을 갚자는 취지에서 시작된 운동이다.

대한매일신보에 나라의 국권회복을 위해 2천만 동포가 금연을 통해 모은 돈으로 국채를 보상하자는 취지문이 발표되자, 전국의 남녀노소, 빈부귀천, 종교를 뛰어 넘어 일본, 미국, 러시아의 동포들까지 참여한 모금운동으로 확대되어 한말 최대의 민족운동이 되었다.

그러나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하고 있던 대한매일신보에 대한 탄압과 발행인인 영국인 베델 추방 공작이 전개되고, 1908년에는 대한매일신보 총무인 양기탁에게 국채보상금을 횡령하였다는 혐의를 씌워 구속하는 등 일제의 탄압이 가속되자 국채보상운동이 크게 위축되어 좌절되고 말았다.

국채보상운동은 일제의 탄압으로 3개월이라는 단기간 동안 전개되고 실패로 끝났지만, 우리 민족 자주독립운동의 새로운 지평을 연 역사적인 운동으로 평가된다.

특히 국채보상운동 기록물은 국가가 진 빚을 갚기 위해 한국에서 1907년부터 1910년까지 일어난 국채보상운동의 전 과정을 보여주는 기록물로 총 2,470건이 있다. 자국을 구하기 위하여 전 국민의 약 25%가 외채를 갚아 국민으로서 책임을 다하려 한 국민적 기부운동이었다상운동기는 점과 제국주의 침략을 받은 여러 국가에서 유사한 방식으로 연이어 일어난 점 등으로 세계적 중요성을 인정받아 2017년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이 날 기념식은 박신한 대구지방보훈청장을 비롯하여 각계인사, 독립운동 관련 단체 대표 및 회원, 시민 등 1,0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취지문 낭독, 기념사 및 축사, 주제공연, 시상, 축하공연 등의 순으로 진행된다.

취재팀 임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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