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칩(驚蟄)을 전후하여 남도 곳곳에 화신(花信)이 이른다. 부지런한 동백과 매화, 산수유 등 온갖 꽃들이 다투어 꽃망울을 터트리는 백화쟁발(百花爭發). 겨우내 한파에 움츠렸던 고로쇠나무의 달짜근한 수액이 군침을 돌게 한다. 곳곳의 실개천도 감미로운 물소리로 봄을 속삭이고, 풋풋한 봄나물은 수줍은 처녀마냥 살포시 고개를 내밀어 완연한 봄을 알린다.
이때 맨 먼저 달려와 봄을 알리는 것은 단연 매화다. 특히 아직은 모든 생물이 엄동설한에 떨고 있을 때, 화사하고 고운 자태를 피어 내는 설중매(雪中梅)는 불의에 결코 굽히지 않는 고매한 선비정신의 표상으로 여겨왔다.
시인묵객들의 작품 속에 곧잘 등장하는 설중매는 한매(寒梅)라고도 불리며, 주로 난대성인 중국 강남에 자생하는 매화를 말한다. 사실 겨울이 길고 추운 한국에서는 눈 속에 꽃을 피우기는 어렵고, 이른 봄에 핀 매화에 눈이 덮여 있는 것을 설중매라 한다. 몇 년 전부터 급변한 기온 탓에 우리나라도 갈수록 겨울이 사라지고 있어 설중매라 부르기도 멋쩍다.
매화의 아름다움으로는 홍매(紅梅)를 빼 놓을 수는 없다. 예쁜 색시 얼굴에 연지곤지를 칠 한 것 같은 홍매는 보는 이의 마음을 흥분케 한다. 남도에서 홍매로 유명한 곳은 전남대학교 캠퍼스, 구례 화엄사, 순천 금둔사의 홍매를 꼽는다. 예전에 한량(閑良)처럼 탐매(探梅)차 발품을 판적이 있었는데, 완주 위봉사 홍매와 산청의 남명매와 단속사 홍매가 아직도 눈에 선하다.
전남대 홍매는 명나라 황제에게 받은 것으로 4백 살이 넘고, 농익은 여인내의 볼과 엷게 익은 복숭아 같은 색이 특징이다. 화엄사의 홍매는 진한 분홍과 적색에 가까울 만큼 선홍색이어서 보는 이의 가슴을 헤집어 놓는다. 정결하고 소박한 여인의 자용(姿容)을 다소곳이 드러내는 백매(白梅)는 남도 매화의 상징이다. 섬진강변 산자락에 하얀 꽃구름이 내려앉은 듯 장관을 이룰 때면 온 산하는 인산인해로 넘실거린다. 난초, 국화, 대나무와 함께 사군자로 추앙 받는 매화는 얘기 거리도 많다. 왕실에서는 임금의 대변을 매화 열매인 ‘매실(梅實)’로, 소변은 ‘매우(梅雨)’ 라고 미화(美化)에서 부른다.
퇴계 이황 선생이 단양군수로 있을 당시 선생을 사모했던 두향(杜香)이란 관기가 선생과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생이별할 때, 백매화를 정표로 바쳤다. 평소 수많은 매화를 좋아했던 퇴계는 특별히 백매를 도산서원 뜰에 심어두고 그녀를 그리워했다고 하는데, 백매는 지금까지도 대(代)를 이어 두 사람의 애절한 러브스토리를 전해주고 있어 감동스럽다.
매화는 4가지의 고귀함을 자랑으로 여긴다. 함부로 번성하지 않는 희소가치성, 어린 나무가 아닌 고목의 생명성, 살이 쩌 둔하지 않고 홀 쭉 강건한 자태, 만개한 꽃보다는 반개(半開)한 꽃봉오리이다.
예부터 맨 먼저 꽃이 피어 봄소식을 전하는 매화를 춘선(春先)이라 했다. 화공(畵工)들이 매화가지에 까치가 앉아 있는 그림을 봄을 맞아 맨 먼저 기쁜 소식을 전한다하여 즐겨 그렸고, 희보춘선(喜報春先)이라 읽었다.
만물이 생동하는 봄은 다가왔지만 코로나19로 온 나라 사람들이 위축되어 생기를 잃고 실의에 빠져있다. 그야말로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다. 이럴 때 일수록 따뜻하고 기쁜 소식을 전해 줄 까치와 매화를 그리며 희망을 다져본다.
대동문화재단 대표 조상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