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은 많으나 스승이 없다”는 말이 있다. 선생과 스승은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 법륜스님은 “선생은 지식 기술자이고, 스승은 인격자를 키우는 사람”이라 했다.
선생과 스승 모두 가르치는 자라는 점에서는 같지만 선생은 단지 직업적으로 가르치는 사람이고 선생(先生)이란 말은 나보다 먼저(先) 학생(生)이 되어 배운 자를 말한다. 스승은 덕망이 높고 삶의 본을 보여 제자들이 올바른 삶을 살도록 이끄는 사람이란 의미가 담겨있다. 오늘날 스승은 단순히 지식을 가르치는 선생이란 뜻만이 아니라 삶의 지혜까지도 가르치는 정신적인 선생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고 있다. 때문에 ‘선생이란 직업은 있어도 스승이란 직업은 없다’는 말이 생겨난 것이 아닐까.
교육현장에서 지식만을 가르치는 선생님은 교육현장을 벗어나면 관계가 소원해지지만, 학덕이 높고 존경을 받으며 올바른 삶을 이끌어주는 참 스승이라면 아름다운 사제관계가 지속된다.
도가에서 도를 닦기 위한 조건으로 법(法), 재(財), 지(地), 여(侶)를 강조하는데, 이때 자신을 이끌어 줄 스승(法)을 가장 중요시 한다. 스승은 책에서 만날 수 없는, 입과 마음으로 전할 수밖에 없는 구전심수(口傳心授)의 현묘한 부분을 체득하게 해 줄 뿐만 아니라, 학업의 성취와 출세 등에 절대적 영향을 미친다. 때문에 옛사람들은 좋은 스승을 찾아 이역만리 길을 멀다하지 않았고, 훌륭한 스승과 사제연(師弟緣)을 맺는 것을 대단히 소중하게 여겼다. 소치가 과천으로 추사를 찾아 가고, 추사가 연경에서 완원과 옹방강을 만나 사제인연을 맺은 것도 이러한 이유였다.
예부터 자식을 바꿔서 가르친다하여 역자교지(易子敎之)라 했다. 자기 자식이나 피붙이를 직접 가르치다보면 감정에 치우치기 쉽다. 때문에 자녀의 장래를 걱정하는 부모는 훌륭한 선생을 찾아 자녀 교육을 맡기는 것이 더욱 효과적이라 여겼고, 선생은 학생의 아버지와 형을 대신하여 제자를 훈육했던 것이다.
‘스승’과 ‘제자’는 상대적 개념어이다. 제자(弟子)에서 아우 제(弟)의 상대글자는 형(兄), 아들 자(子)의 상대 글자는 부(父)이다. 제자라는 말속에는 스승을 아버지와 형, 곧 부형의 도리로 섬기겠다는 뜻이 담겨 있는 것이다. 학생의 가족을 학부형(學父兄)이라 호칭한 것도 같은 논리다.
‘스승의 그림자는 밟지도 않는다’ 는 말이 있을 만큼 제자의 스승에 대한 존경은 극진했다. 스승에게도 원칙을 고수하는 사도(師道)가 있었기 때문에 스승은 죽어도 고지식해야 한다는 말이 있다. 원칙과 고지식을 견지하며, 권위를 먹고 살아가는 스승에 관한 동서고금의 흥미 있는 일화가 많다.
미국 작은 도시에서 있었던 실화를 영화화 한 ‘굿모닝 비둘기 선생’이란 영화는 스승의 권위를 잘 말해주는 얘기다. 영화의 주인공 비둘기선생은 그 도시에서 늙도록 교편을 잡아 온 노처녀 선생. 때문에 도시의 시장은 물론, 경찰서장도, 교도소장도, 야채 장수도, 교통순경도, 형무소에 갇힌 죄수까지 모든 시민이 그의 제자였다. 때문에 선생은 길을 가다가도 어느 집의 유리창이 더럽다거나 잔디를 깎지 않았을 경우 집 주인을 불러다 혼을 내준다. 또 죄를 짓고 유치장에 갇혀 있는 자가 있으면 곧바로 훈방조치 하는데, 경찰서장조차 꼼짝 못한다. 선생이 횡단보도를 건널 때는 교통순경이 따라와 모든 차를 멈추게 한다. 그러면 모든 사람들이 차에서 내려 정중히 고개 숙여 인사한다. 선생이 병원에 입원을 하면 병문안을 하느라 온 도시는 철시까지 한다. 이처럼 스승의 권위는 자연스럽게 형성되고 당연하게 부여되었다.
스승은 진리와 정도(正道)를 가르치는 것을 덕목으로 삼는다. 스승이 원칙을 무시한 채 그때그때 사정에 따라 적당히 타협하고 변통을 수시로 하게 된다면 혼돈세상이 된다.
옛날 어느 서당 선생이 중병에 걸려 식음을 전폐하고 와병 중에 있자, 여러 제자들이 미음을 끓여 문병을 왔다. 미음을 드시고 기운을 차리기를 간청하는 제자들에게 스승은 이런 병에 미음을 먹으라는 말이 경전(經典)에 나와 있지 않다며 거부했다. 이에 제자들은 그렇게 입맛이 없으면 꿀물로라도 입을 적시라며 권했지만, 스승은 그 또한 제자들에게 경전에서 그러한 내용을 찾아보라 주문한 와중에 그만 죽고 말았다.
어머니를 잃은 한 상주(喪主)가 서당의 훈장을 찾아가 축문을 지어 달라 청했다. 그런데 훈장이 실수로 장모 초상에 읽는 축문을 지어주고 말았다. 그것도 모르고 빈소에서 축문을 읽어가자 주변사람들이 웅성거리며 잘못된 내용을 지적했고, 이를 알아차린 상주가 훈장에게 달려가 내용이 잘못되었다며 다시 써 줄 것을 요청했다.
훈장이 제자에게 말하기를 “이 사람아, 선생인 내가 축문을 틀리게 써 줄 리가 있겠는가? 아마도 자네 장모가 죽어야 하는데, 어머니가 잘못 죽었을 것이네.” 이에 제자는 “예, 그런 것 같습니다.” 하고 물러 나왔다.
스승의 권위가 땅에 떨어진 요즘 스승다운 스승, 제자다운 제자 찾아보기 힘든 세상에 모순 있는 이야기로 들리지만 스승은 틀려도 틀리지 않을 사람, 모른 것이 있어도, 모르지 않는 사람으로 자타가 인정해 주어야 스승의 명분이나 권위가 바로서고, 권위가 바로서야 제자들의 학습효과가 제대로 이뤄진다는 교훈이 담긴 우스개이다.
우리 역사상 훌륭한 인물을 쏜 꼽으라면 성군 세종과 성웅 이순신을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특히 한글을 창제하여 어리석은 백성들을 가르쳐서 눈을 뜨게 해준 대왕 세종은 우리민족의 큰 스승이 아닌가. 세종의 탄신일인 5월 15일을 ‘스승의 날’ 로 삼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갈수록 우리사회에 스승과 제자, 곧 사제지간(師弟之間)의 존경과 사랑, 부모형제에 대한 효도와 우애, 친구간의 진정한 우정 등을 말하는 것조차 어색하고 고리타분하게 여기는 세상이 되었다. 옛 고사를 통해 아쉬움을 달래보는 5월 ‘가정의 달’이다.
글 조상열 대동문화재단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