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차(茶)의 이야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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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차(茶)의 이야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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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0.07.01 1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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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덕산(萬德山) 한 자락의 백련사(白蓮寺) 주지였던 혜장 선사는 기실은 조정에서 높은 벼슬을 한 정약용에게 학문의 깊이를 묻고자 자리를 청했다. 백련사는 해남 인근 대흥사의 유서 깊은 사찰의 학문적 도량으로 알려진 유명한 곳이다.

 

백련사(白蓮寺)는 신라 문성왕 때 무염 국사(801~888)가 산 이름을 따라 만덕사(萬德寺)라는 이름으로 창건했다. 이후 고려 시대 일반 백성과 스님들이 함께 퇴락한 불교를 다시 일으켜 세운 결사 도량으로 거듭난 곳으로, 고려 희종 7년째인 1211년에 원묘 국사 요세(1163~1245) 스님에 의해 중창과 함께 백련결사(白蓮結社)를 주도하면서 원묘 국사를 포함한 여덟 명의 스님들이 국사로 배출돼 조명 받았던 사찰이다.

 

그런 지엄한 곳의 주지스님이라, 그는 유불선(儒彿禪)의 모든 학문을 총아를 깊이 있게 섭렵한 대흥사 주지를 지낸 강원 도량의 유명한 강사 스님이기도 했다. 그런 혜장스님의 제자로는 색성스님을 비롯한 초의스님 등 조선 후기를 대표할 만한 스님도 여럿 있었다. 그런 그가 과연 조정에서 이조 판서를 지낸 양반의 학문적 깊이는 어떠한가? 하는 관심으로 다산에게 소위 말하는 접근을 한다.

 

“소승 혜장이라 합니다.”

 

빈각에 우울함이라. 일도(一道)의 스님 한 분이 자신을 뵙기를 청한다는 말에 선뜻 길을 나선 길이었다. 당시 다산은 주역에 심취해 있었다. 인생사 무한하다 한들 한때 왕의 주변에서 출세 길을 달리던 자신이 하루아침에 낙화하였으니, 그 허한 마음 고저(高低)에 없이 우울함이었다. 그래서 당시 다산이 심취한 학문이 바로 인생의 길흉화복을 점쳐주는 주역(周易)이었다. 

 

주역은 비단 점술서가 아니라 주나라 시대의 모든 경술해치(庚戌解治)를 모아놓은 학술서이다. 그 안에 모든 이해가 담겨 있고, 더불어 운도의 문문(門門), 그 길이 있다고 다산은 주역의 공부를 할수록 더욱 믿었다. 육간을 놓고 점을 치다보면 인생사 만사지행의 발걸음이 보이는 이치가 이와 같았다.

 

“모든 것은 사함(死)으로 덧없음이라. 그러기에 육간을 따져봄이 또한 죽음보다 낫지 않겠는가?”  

 

혜장의 질문에 단 한마디로 자른 육간, 즉 여섯 번 뒤집으면 석가의 12연기론과 다를 바 없는 길이 보인다는 응수에 혜장은 말문이 턱 막혀버린다. 그 어디서도 배운 바 없는 육간의 논리, 주역의 이해력이었다.

 

그 길로 혜장스님은 제자가 되기를 간청했고, 다산은 그에게 아암(兒菴)이라는 호를 내린다. 즉, 성징이 괴팍했던 혜장에게 아이와 같은 마음을 가져라 하는 아호를 준 것이다. 혜장과 다산의 만남, 이는 가히 운명적이었다. 

 

41살의 짧은 생을 산 혜장은 결국 아이와 같은 마음을 갖지 못한듯하다. 한번 술을 마시면 몇날 며칠 술독에 빠져 지냈고, 그 술독을 차로 씻어내기를 반복했다. 차 한 잔이면 방금 제 속으로 돌아오는 혜장, 다산은 그때마다 다정한 친구처럼 제자 혜장을 챙겼다. 

 

(다음 편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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