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대의 匠人] 정대기 도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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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의 匠人] 정대기 도편수
  • 관리자
  • 승인 2009.08.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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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2년 숭례문 복원 당시의 설계도면을 펼쳐보이는 정대기 도편수



‘나무와 오래 살면 나무를 닮는다’ 고 운을 뗀 순박한 얼굴의 정대기 목수. 영광보다는 순박함으로 60년 나무 인생을 말하고 있는 정대기 목수. 그는 62년 숭례문 복원에 중요 목수로 참여한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고 한다. 오래된 도면 뭉치를 꺼내는데 놀랍게도 62년 당시 숭례문 복원에 관한 모든 기록, 실시설계 도면이었다. 그가 숭례문 복원 과정에서 얼마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는지를 증명하고도 남는 숭례문에 관한 기록들.



어려운 가정 형편에 중학교를 중퇴하고 동네 ‘이익현’이라는 목수를 따라서 첫 나무 판에 발을 들여놓은 게 평생 목수로 살아가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이익현은 당시에도 상당한 목조건축 전문가로서 사찰이나 한옥신축에 일가견이 있었던 인물이었다.



“처마의 아치형 곡선은 정말 탁월했지.” 라고 말하는 78세의 정대기 씨는 이제 옛 시절로만 기억되는 스승에 대한 애잔한 마음을 토해냈다. “목수라는 직업이 밥 먹고 사는 데는 그만한 일이 없었어.” 온갖 허드렛일을 도맡아했던 15살의 정대기 씨. 그 시절이 지나 이제는 어느 덧 팔순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정대기 씨가 고건축에 본격적으로 눈을 뜨게 된 것은 중요무형문화재 제 74호 대목장이었던 이광규 선생을 만나면서부터였다. 목수로서 풋내기였던 당시, 같은 마을의 목수 박광석과 도편수 이광규 선생과 함께 청룡사 누각 및 요사채 건립에 참여하면서 고건축의 기본을 익히게 되었다.



“연장하나 잘못 잡으면 볼호령이 떨어지곤 했지.” 정대기 씨는 아직도 스승 이광규 선생의 쩌렁쩌렁한 목소리를 기억해내면서 움찔하고는 한다. “그러다 이광규 선생의 도움으로 만나게 된 분이 바로 고건축 분야의 전설적인 목수 조원재 선생이었어.” 하면서 재차 조원재 선생에 대한 아련한 기억을 떠올렸다.



“조원재 선생이야 말로 궁궐 목수의 대가야. 그분을 따라서 서울 삼일문 증축공사에 참여한 것은 영광이었어. 아직 풋내기에 불과한 나를 아주 잘 대해주셨거든. 나는 꾀부릴 줄도 모르고 선생이 시키면 시키는 대로 며칠이고 공사 현장에서 나락 잠을 자면서 일만했지.” 그래서 그런지 아주 가끔 “조금만 더 배우면 잘하겠구먼.” 했던 조원재 선생의 말 한마디에 정대기 씨는 온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았다고 말한다.



이후 정대기 목수는 62년 숭례문 복원공사에 역시 도편수 조원재 선생의 지휘 하에 비중 있는 목수로 참여하게 되었다. 당시 현재 무형문화재 74호 대목장으로 지정된 신응수 목수와 최기영 목수는 정대기 목수보다는 비중이 낮았다고 한다.



“그런데 두 사람은 대목장이 되었고…, 나는 아직도 허술한 창고에서 나무나 다듬고 있지.” 하면서 말끝을 흐리는 노(老) 목수. 재차 숭례문 복원 과정에서 보관하고 있던 도면을 펼쳐 보이면서 “보의 곡선이 정확하게 어느 방향으로 가늠되어져야 하는지 고민해봐야 하는 것이지. 목수가 중요하다는 것은 바로 이런 점 때문이야. 고건축은 설계도면대로 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목수의 탁월한 감각으로 처마의 곡선을 만들어내는 것이 더 중요한 거야.”







▲ 대패질 시범을 보이고 있는 정대기 도편수



마침내 1969년 삼청각 신축공사에서 처음으로 도편수가 된 정대기 씨. 부자가 되기 위해 목수 일을 한 것은 아니라고 한다. 명성을 얻기 위해 목수 일을 한 것도 아니다. 그는 나무를 다루는 목수야 말로 자신에게 정말 딱 어울리는 천직(天職)이라고, 그래서 자신의 사숙들이 중요문형문화재 74호, 즉 대목장이 되어도 그런 쪽에는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고 한다.



“한번은 신응수 대목이 나보고 아니 왜 중요무형문화재 신청을 하지 않느냐고 핀잔을 하더란 말이야.” 그래서 떠밀리듯 서류를 내밀었다고 한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서류는 채택되지 않았고, 더 이상은 내 복이 아니려니 하고 체념했다고 한다.



전통고건축 목수로서 살아온 정대기 목수의 인생, 누구에게 그 많은 시간을 보상받아야 하는지 모르지만 문득 궁궐의 고건축, 사찰의 아름다운 고건축을 감상하는 동안에 그에게 갚아야할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느낀다.



정대기 목수는 아들 셋을 모조리 목수로 키워냈다. 또한 사위까지도. 그들에게 자랑스러운 아버지이자 스승이 되길 원하는 정대기 목수의 꿈은 바로 당대 최고의 목수였던 조원재 선생의 당당한 제자라는 사실 하나만은 인정받고 싶다는 것이다. 그것이 그가 장인으로서 살아온 삶을 보상받을 수 있는 전부라고 한다.







▲ 정대기 장인이 공사한 봉영사 지장전



[정대기 장인 인터뷰]



- 처음에 어떻게 목수 일을 배우게 되셨나요?



제가 여주 시골에 살았는데요. 시골도 대목이 있잖아요. 이익현이라는 분이 있었는데 생활이 어렵고 하니까 제가 그것을 배워보려고 했어요. 그때가 한 열 대여섯? 해방되고 쫓아다녔으니까요. 제가 배우려고 노력하다보니까 건축에 관한 것은 대번 터득이 되더라고요. 우리 선배도 저 하는 것을 보더니 ‘야, 너 이거 해먹겠다. 너 하는 거 보니까.’ 그랬어요.



- 본격적으로 목수 일을 배운 것은 어느 분 밑에서였나요?



조원재 선생님한테 배웠어요. 그 위에 또 최원식 선생님이 계신데 그 분한테서 전수돼서 내려온 거지요. 조원재 선생님이 우리나라에서 궁궐목수로는 최고였어요. 신응수(중요무형문화재 대목장) 씨의 스승인 이광규 씨도 조원재 선생님 밑에서 일을 배운 거예요. 나중에 조 선생님이 나이가 많이 드셔서 직접 하기 힘드시니까 나한테 일을 거의 맡기셨어요. 그래서 경복궁, 덕수궁, 창덕궁 등 보수공사를 제가 많이 했었지요.



- 62년 숭례문 보수공사 때도 조원재 선생님과 참여하신 것으로 압니다. 작년 화재로 숭례문이 소실 됐을 때 심경이 어떠셨나요?



그건 말할 수도 없지. 난 지나갈 때마다 거기를 쳐다보며 지나가요. ‘그래도 의의가 있다, 내가 여기 참여 했다는 것이….’ 불타기 전에도 그 남대문로만 지나면 쳐다봤다니까. 그리고 대한문을 내가 보수공사 했잖아요. 대한문 공사할 때 차타고 내려오면 거기(숭례문)부터 보이잖아요. 그렇게 남대문을 남다르게 많이 생각했어요.



- 수십 년간 전통건축물을 공사하셨는데 우리 전통건축의 아름다움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한옥은 추녀가 제일 생명이에요. 추녀 곡선이 시원찮으면 날아가는 학이 날개가 부러져서 처진 격이니까 제일 신경 쓰는 것이 처마곡선이에요.



- 그럼 선생님이 생각하시는 가장 처마곡선이 아름다운 전통건축물은 무엇인가요?



남대문 곡선이 참 멋진 곡선이에요. 처지지도 않고 올라가지도 않고, 참 힘이 있어 보이잖아요.



- 선생님이 공사하신 건축물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은 어디인가요?



월정사 법당. 그래도 우리가 처음으로 큰 법당 짓기는 그때가 처음이거든요. 거기는 겉만 보고는 몰라요. 내부에 오포(五包)가 한 돌림이 돌아갔어요. 그게 특기에요. 오포라고 포를 5겹 쌓은 것을 내부 중간에 한바퀴 둘렀어요. 월정사 법당에 오포를 두른 것은 기록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직접 생각해 낸 거예요.



-후배 목수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항상 모든 일을 꼼꼼히 착실하게 하라는 거예요. 한번 손댄 것을 두 번 다시 대지 않도록 하는 것이 우리 장인 정신이에요.



-2006년에 무형문화재를 신청하셨다가 안 되셨는데, 그 이전에는 무형문화재를 신청해보려는 생각을 안 하셨나요?



일에만 열중했지 무형문화재가 어떤 절차를 밟아서 하는지 몰라서 못했었지요.



- 무형문화재를 신청하시게 된 이유가 있을 것 같은데요.



내 밑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더 열심히 해서 내 기술을 이어간다는 그런 뜻이지요 뭐. 무형문화재가 돼서 지원이 나오면 내 밑에서 일하는 제자들 교육비로 써야지요.



- 다시 무형문화재를 신청해보실 생각이신가요?



해야지요. 해서 마무리를 지으면 좋지요. 지금 항상 꺼림칙해. 마음이 언짢아요. 내가 좀 창피스러운 생각도 들어요.







▲ 정대기(좌), 정정수(우) 장인



[정정수 장인 인터뷰]



- 부친이신 정대기 선생님께서 무형문화재를 신청하셨다가 안 되셨는데요.



안타깝죠. 이런 큰 어르신이 여태 안 됐다는 것이 목수로서 참 안타까운 일이지요. 자료가 미비했던 것도 사실이에요. 아버님 같은 경우는 일만 하셨지 그런 자료를 남겨놓을 생각도 못하시고…오로지 목수 일만 하셔서 무형문화재나 그런 생각이 없으셨어요. 그런데 나중에 후대를 양성하려는 생각을 하다보니까 자본적인 문제도 있고….



- 대를 이어 목수 일을 하고 계신데, 어떻게 목수 일을 하려는 결심을 하셨는지요.



결심을 한 것은 없고 어렸을 때부터 보고 배운 것이 한옥, 고건축, 문화재 계통이라 자연스럽게 그냥 흐름을 따랐다고 할까요. 보고 들은 환경이 그러니까 저도 모르게 젖어든 거지요.



- 아들이자 후배 목수로서, 정대기 선생님의 뜻을 이어 앞으로 진행하고 싶은 계획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제가 보는 책자나 문헌이 옛날에 아버지께 배우던 것과 안 맞는 것이 너무 많아서 그것을 옛날 고증대로 복원시키고, 목수일도 옛날 방식대로 복원해서 그런 것을 후배들에게 가르쳐주고 싶어요. 지금 기계가 발달해서 너무 건물이 마구잡이니까 그런 것들을 옛날식으로 복원하는 것이 꿈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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