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대의 匠人] 이재순 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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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의 匠人] 이재순 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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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9.08.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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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재순 석장 (중요무형문화재 제120호)




우리나라의 석재는 주로 화강암이다. 유럽에서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대리석이나 일본의 사암, 석회암보다 재질이 매우 단단해 가공하기가 쉽지 않다. 불국사 다보탑의 복잡하면서도 섬세한 조각에 세계가 놀라는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다.



그런 단단한 석재로 목탑보다 더 정교한 조각을 해냈던 우리의 옛 석공들, 그들의 뛰어난 솜씨는 그대로 후대의 석공들에게 이어져 현재까지 전수되고 있다. 특히 현재 활약하고 있는 석공들 가운데에서는 중요무형문화재 이재순 장인의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이재순 장인은 석장(石匠, 중요무형문화재 제120호)으로서는 우리나라 최초의 중요무형문화재다. 그의 스승은 김진영 선생으로, 조선시대 경복궁의 석조물을 조각한 이세욱 선생과 김맹주 선생의 맥을 잇는 석조각계의 대가였다.



“스승님은 조각을 어떻게 하는 지를 가르치기 보다는 사람 됨됨이를 중요하게 여기셨어요. 그리고 돌을 그냥 돌 한 부분으로 봐서는 안 된다는 큰 생각을 제게 자주 말씀해주셨지요.”



김진영 선생을 만난 것이 그의 인생에 있어 첫 번째 사건이라면 두 번째는 북관대첩비를 만났던 때일 것이다.



2005년, 일제가 가져간 북관대첩비(임진왜란 때 정문부를 대장으로 한 함경도 의병의 전승비)의 환수운동이 벌어지고 있을 때였다. 어느 날 문화재청에서 북관대첩비가 환수될 경우를 대비해 좌대와 옥개석을 복원해 달라는 연락이 왔다. 환수가 될지 안 될지도 불투명 했던 시기라 금전적, 시간적 손해가 날 것을 각오하고 해야 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흔쾌히 하겠다는 뜻을 전했다.



다행히도 후에 북관대첩비는 무사히 반환이 돼 우리나라를 거쳐 북한으로 돌아갔고, 이재순 장인이 복원한 옥개석을 머리에 인 채 북한 국보 193호로 지정됐다. 장인으로서는 더없이 영광스러운 일이었다.



“(북관대첩비를 만난 것은) 좋은 인연이었지요…. 그야말로. 누가 하려고해서 되는 것이 아니고…. 고마운 일이지요.”



돌을 다루는 일을 해오면서 이처럼 고맙고 좋은 일도 많았지만 반면에 안타까운 일들도 많이 만나게 됐다. 그 중에서도 특히 국보 101호 ‘법천사지광국사현묘탑’의 보존처리는 이재순 장인이 가장 시급하게 해결해야 한다고 여기는 문제다. 현재 지광국사현묘탑은 언제 무너질지 모를 정도로 아슬아슬한 상태다.



“너무 급해요. 급하다는 걸 다 알고 계신 것 같은데 차마 손을 못 대고 있는데요. 저희가 봤을 때는 지금 보존처리를 해야 되거든요. 탑을 들어내면 다시 보존처리를 다 해야 되니까 결정을 못해서 그러는 것 같은데…. 그렇게 급한 것은 저희들 입장에서는 빨리 결정을 좀 해주셨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이재순 장인에게 돌은 무엇보다 특별한 존재다. 40여 년간 돌을 다루면서 느낀 점도 많다.



“돌은 거짓말을 안 해요. 화난 마음으로 작업을 하면 화나 있어요, 돌이. 기분 좋아서 하면 기분 좋은 느낌이 있고. 어떻게 마음을 썼느냐에 따라 그대로 표현된다는 것이죠. 참 흥미로워요. 그런 부분이. 그렇게 항상 돌이 주는 순수함. 돌의 정직성 그런 것에 매력이 있습니다.”



문득 이재순 장인의 손을 내려다 봤다. 보통 사람들보다 두껍고 넓적한 손이다. 어려서부터 연장을 잡았기 때문일까. 돌이 그것을 다루는 사람의 마음을 그대로 표현해내는 것처럼 손도 그 사람이 살아온 세월과 노력의 흔적을 그대로 내보여준다. 다른 이들은 못생기고 투박한 손이라 할지 모르지만 그 손이 바로 장인이 돌에 바친 지난 40년 세월의 증표일 것이다.







▲ 이재순 장인의 작업장 입구에 늘어서있는 석조각들




[이재순 장인 인터뷰]




- 처음 돌을 다루시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우리 식구들이 외삼촌도 하시고 우리 형도 했고. 처음에는 특별히 돌에 생각을 갖고 한 것은 아니고요. 몇 가지 다른 일도 해보고 그러다가 돌일을 해보면 어떠냐고 해서…. 후에 제가 몇 년 약간 지나서 석굴암을 보고 마음을 굳힌 겁니다.



- 본격적으로 석조각을 배우게 된 것은 어느 스승님 밑에서 였나요?



김진영 선생님을 그 전부터 뵀던 분인데, 그 분께 본격적으로 조각에 대해서 수업을 받은 겁니다. 그 분이 그 시대의 대가였어요. 아주 조각을 잘하시는 분이셨어요.



- 스승님께 주로 어떤 것을 배우셨나요?


스승님은 조각을 어떻게 하는 지를 가르치기 보다는 사람 됨됨이를 중요하게 여기셨어요. 격려를 잘 해주셨다고 할까요. 앞으로 크게 봐야 된다, 돌을 그냥 돌 한 부분으로 봐서는 안 된다는 큰 생각을 제게 자주 말씀해주셨지요.



- 요새는 기계가 많이 하지만 예전에는 기계가 제대로 된 것이 없어서 더 힘이 드셨을 것 같은데요.



돌 자체가 거의 중노동이라고 봐야 돼요. 아침에 나와서 연장을 벼려서 낮에 작업하고 나면 다시 다음날 연장을 벼려야 되는. 새벽에 나가서 연장 벼리고 해뜨면 작업하고…. 일주일에 3, 4일 하면 2, 3일 쉬어야 될 정도로 힘든 일이었어요. 하루 종일 망치질을 해야 하니까.



- 힘든 직업임에도 불구하고 40여 년 동안 이 일을 해 오신 이유는 무엇인가요?



돌은 거짓말을 안 해요. 화난 마음으로 작업을 하면 화나 있어요, 돌이. 기분 좋아서 하면 기분 좋은 느낌이 있고. 어떻게 마음을 썼느냐에 따라 그대로 표현된다는 것이죠. 참 흥미로워요. 그런 부분이. 그렇게 항상 돌이 주는 순수함. 돌의 정직성 그런 것에 매력이 있습니다.



- 가장 기억에 남는 작업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북관 대첩비를 일본사람들한테 달라고 하니까 북한하고 협의해오라고 했어요. 일본 사람들은 북한하고 협의하라고 하면 당연히 안 될 것이라고 본거에요. 그런데 당시에 유홍준 문화재청장이나 그 외에 국회의원들이 얘기해가지고 잠시 우리나라에 몇 개월만 있다가 (북한으로)가는 것으로 하고 비를 가져오게 됐습니다.

가져오기 전에 비가 올지 안 올지 모르는데 이 작업을 할 수 있겠냐. 아직 북측하고 협의가 안 된 상황인데, 협의가 되면 바로 움직여야 되니까. 그래서 당시에 문화재청에 분들이 이야기 하시 길래 흔쾌히, 안 오면 제가 손해보고 말겠다고 그랬는데 운이 닿아서 (비가) 온 거예요. 그러데 비만 왔거든요. 그래서 아래 좌대하고 위에 옥개석 부분을 제가 작업을 하고….

북한이 현지에 가서 비를 세우려고 발굴하니까 좌대가 나왔어요. 비 부분만 빼간 거지요, 일본사람들이. 그래서 좌대는 그대로 쓰고 위에 머릿돌, 옥개석은 제가 제작한 것으로 해서 북한 국보 193호로 지정받았습니다.












- 2007년에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셨는데요. 석장으로는 최초라고 알고 있습니다.




지정한 이유가 뭐냐 하면 알고 있는 자체를 전수하고 죽어라, 너 자신이 배운 것을 후대에 가르쳐 줘라…. 그건 기본적인 것이고 결국은 석조문화를 선도해야하는 그런 큰 의미가 있는 것이죠. 그래서 아무래도 여러 가지 더 바빠졌어요. 해야 될 일이 많고. 챙겨야 될 일이 많고.

- 우리나라의
석조 문화재 관리는 어떻다고 보십니까?




지광국사현묘탑 같은 경우는 (보존처리가) 너무 급해요. 급하다는 걸 다 알고 계신 것 같은데 차마 손을 못 대고 있는데요. 저희가 봤을 때는 지금 보존처리를 해야 되거든요. 탑을 들어내면 다시 보존처리를 다 해야 되니까 결정을 못해서 그러는 것 같은데…. 그렇게 급한 건 저희들 입장에서는 빨리 결정을 좀 해주셨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선배 장인으로써 후배 장인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돌을 다루기가 힘드니까 잠깐 5년, 10년 하다가 전업을 하는 사람이 참 많아요. 그런데 끝까지 간다면 승부는 있을 것이다, 언제나 일이라는 것은 실패도 하고 가다가 잘 안될 수도 있지만 거기에 좌절하지 말고 노력한다면 성과가 있으니까 과정만 중시하면서 간다면 분명히 큰일을 해낼 것이다…그런 말을 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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