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색한 모습의 전곶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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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색한 모습의 전곶교
  • 관리자
  • 승인 2007.06.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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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관교(살곶이다리)는 조선시대의 수도인 한양과 강릉ㆍ충주 지방을 연결하는 주요 통로로 사용되던
다리로, 현존하는 조선시대 돌다리 중 가장 길다.

살곶이는 청계천이 중랑천과 만나 한강으로 흘러드는 지역으로, 한양대학교에서 내려다보이는 개울 부근이다. 이곳은 넓고 풀과 버들이
무성하여 조선 초부터 국가의 말을 먹이는 마장(馬場) 또는 군대의 열무장(閱武場)으로 사용되었던 곳이기도 하였다.

이곳에 다리를 만든 것은 정종과 태종의 잦은 행차 때문이었다. 세종 즉위 후 태종은 광나루에서 매사냥을 즐기고, 살곶이에 있는
낙천정(樂天亭)과 풍양이궁(壤離宮)에 수시로 행차하였다. 따라서 이곳의 하천을 안전하게 건너기 위하여 다리를 놓게 되었다고 한다.







 
















입구에서 바라본 전곶교








세종 2년(1420) 5월 태종은 영의정 유정현(柳廷顯)․박자청(朴子靑)으로
하여금 비로소 돌다리 세우는 공사를 담당하게 하였으나, 완공을 보지 못하였다. 세종 4년(1422)에 태종이 죽자 이곳을 통한
행차가 거의 없어지고, 또한 세종 3년부터 시작된 도성 안 개천(開川)․제방축조공사로 인해 도성 밖 이곳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길을 이용하는 백성들로 인하여 살곶이다리를 만들 필요성이 다시 제기되어, 성종 6년(1475) 9월 살곶이다리를
완성시킬 것을 양주목(楊州牧)에 명령하였다.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考)≫에 따르면 성종 13년(1482) 한 승려가 방법을 고안하여 다리를 완공하자, 왕이 이를
치하하고 다리가 집과 같이 평평하여 마치 평지를 걷는 것과 같다 하여 ‘제반교(濟盤橋)’ 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전곶교의 다리밑 모습







 






이렇게 완성된 살곶이다리는 조선 초기에 만들어진 장석판교(長石板橋)
중 가장 큰 규모의 다리로서, 가로로 놓인 기둥이 4열, 세로로 16열에 모두 64개의 돌기둥으로 만들어졌다. 다리 높이는
하상(河上)으로부터 10척 내외이며 기둥의 높이는 4척 가량이다. 좌우의 교안(橋岸)을 장대석(長臺石)으로 쌓고 네모난 돌기둥
교각 16개소를 세웠다. 교각의 간격은 대략 11~13척 정도이며, 돌기둥 위를 3장의 장대석을 건너지른 다음 그 위에 다시
귀틀돌을 놓아 청판돌을 받게 한 구조이다. 기둥돌 아래에는 물밑의 받침돌이 네모난 주춧돌을 지탱하고 있으며, 주춧돌 사이에는
포석을 깔아 기초를 단단히 하였다. 따라서 물이 줄 때는 이 포석 면이 드러나 마치 지금의 잠수교와 같아 ‘이층다리’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돌기둥은 흐르는 물의 저항을 줄이기 위해 마름모형으로 만들어져 있다. 큰 혹띠기로 표면을 가공하였고 조립할 때
잔돌을 많이 사용하여 뜬 곳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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