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성황후 시해된 ‘건청궁’ 백여 년 만에 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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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 시해된 ‘건청궁’ 백여 년 만에 복원
  • 관리자
  • 승인 2007.10.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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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10대 임금 연산군만큼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인물도






오늘 4월 6







 



 







▶ 건청궁 옛 모습







 








 



 







▶ 백여 년 만에 복원된 건청궁







 







명성황후 시해, 최초의 전깃불 점등 등 대한민국 근대사의 장이었던 경복궁 건청궁이 복원되어
20일부터 일반에 개방된다.



건청궁은 1873년 조선 역대임금의 초상화인 어진(御眞) 등을 보관한다는 명목 하에 고종의 주도로 지어졌다. 궁궐의 깊숙한 곳에
비밀리에 건청궁 공사를 시작한 고종은 후에 관료들이 이를 알고 ‘백성들의 부담을 가중 시킨다’는 이유를 들어 반대하자 “자비로
충당하는 것”이라며 끝까지 공사를 강행했다. 건청궁이 지어진 1873년은 고종이 친정을 선언한 해로, 건청궁의 건립은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에게서 벗어남과 동시에 정국을 주도하겠다는 고종의 의지라고 볼 수 있다.



건청궁을 매우 마음에 들어 했던 고종은 명성황후와 이곳에 머물며 조선의 근대화를 이루기 위해 여러 가지 시도를 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건청궁에 전등을 설치한 것이었다. 당시 궁에서는 밀초나 쇠기름으로 만든 초를 사용했으나 냄새도 심하고 빛 또한 약해
불편한 점이 많았다. 고종은 1887년 미국의 에디슨전기회사를 통해 발전기를 설치하고 우리나라 최초로 건청궁에 전등을 밝혀
근대화의 시작을 알렸다. 이는 일본이나 중국에 비해서도 2년이나 앞선 시도였다.



또한 고종은 이곳에서 미국, 영국, 러시아의 공사들을 접견하는 등 근대 개화기에 열강들의 세력 다툼 속에서도 국제적인 교류를
통해서 민족의 자주의식을 지키려하기도 했다.



하지만 일본은 근대화와 함께 자신들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려는 조선의 모습에 불안을 느끼고 1895년, 을미왜변을 일으킨다.
궁에 잠입한 일본 낭인들은 건청궁의 곤녕합에서 명성황후를 시해한 후 건청궁 동쪽에 있는 언덕에서 시체를 태우고 재는 향원정 연못에
버리는 만행을 저지르게 된다. (명성황후가 장안당에서 시해되었다는 주장도 있음)



1896년 고종이 러시아 공관으로 피신하면서 주인을 잃은 건청궁은 1909년에 일제에 의해 훼손, 철거되어 그 위에 조선총독부
미술관이 지어지는 수모를 당했으며 한동안 국립현대미술관으로 사용되다가 1998년 철거되었다. 이후 2004년 6월부터 2007년
10월까지 진행된 복원 공사를 통해 백여 년 만에 그 원형을 회복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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