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 창건 당시 위치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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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 창건 당시 위치 찾았다
  • 관리자
  • 승인 2007.11.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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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10대 임금 연산군만큼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인물도






오늘 4월 6







 



 







▶ 경복궁 창건 당시 광화문의 흔적 (홈은 문설주를 끼운
곳)







 







고종(1865년) 때 중건된 광화문이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경복궁 창건 당시의 원 광화문과 거의
똑같은 위치에 지어졌던 것으로 확인됐다.



‘경복궁 광화문지 및 월대 지역에 대한 발굴조사를 실시하고 있는 국립문화재연구소는 1일, 고종 2년에 지어진 광화문의 기초 밑에서
경복궁 창건 당시(태조 4년, 1395) 광화문지의 기초를 일부 확인했다고 밝혔다.



‘경복궁 광화문지 및 월대 지역’ 발굴조사는 1927년 일제가 조선총독부를 신축하면서 광화문을 건춘문 북편으로 이건한지 80여 년
만에 진행된 ‘경복궁 광화문 및 기타권역 복원정비 사업’의 일환으로 진행된 것으로, 최종적으로 확인된 광화문의 규모는
34.8m(동서길이) × 14.5m(남북최대잔존길이)이다.







 








 



 







▶ 경복궁 광화문지 및 월대지역 발굴조사지 전경







 







광화문의 기초는 지반을 다지기 위해 뻘층에 지정말뚝을 박고 그 위에 마치 시루떡을 쌓듯 잡석과
흙을 여러 차례 번갈아 가며 쌓아 올려 축조하였는데, 지정말뚝(80~140cm, 두께 10cm 내외)은 30~50cm 정도의
일정한 간격으로 박아 지반의 침하를 방지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고, 그 위에 잡석과 흙을 켜켜이 쌓은 태조 때의 광화문 기초와 고종
때의 광화문 기초가 중첩되어 확인되었다.



이중 태조 때의 광화문 기초는 ‘U’자형으로 넓게 터파기하여 황색점토와 잡석(20×30×15cm)이 포함된 고동색 사질토를
6단으로 번갈아 가며 쌓았으며, 그 위에 고종 때의 광화문을 육축이 올라가는 부분에는 큰 방형(60×60×40cm) 혹은
장방형(140×50×30cm)의 석재를 2~3단으로, 그 사이 통로 부분은 흑색 사질토와 할석(잡석)을 번갈아 3~4단으로 쌓으며
증축하였다. 즉, 지정 말목층의 깊이는 1.6m, 광화문 기초판축부의 깊이는 태조 때 1.3m, 그리고 그 위에 고종 때 광화문
기초 0.7m를 추가로 덧댄 것으로 확인되었다.



국립문화재연구소 관계자는 “이번 발굴조사를 통하여 그동안 제자리를 찾지 못했던 광화문의 제 위치와 정확한 규모를 파악하였으며,
아울러 조선시대 당시 현대 기술에 버금가는 궁성문의 정교한 축조기법과 태조연간의 광화문의 존재도 확인되어 창건 당시 경복궁의
규모를 밝히는 중요한 단서를 확보했다”며, “향후 광화문과 월대, 궁장은 이러한 발굴조사 결과를 토대로 복원ㆍ정비될 예정”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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