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건당시 광화문유구, 보존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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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건당시 광화문유구, 보존될까
  • 관리자
  • 승인 2007.12.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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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10대 임금 연산군만큼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인물도






오늘 4월 6







 



 







▶ 태조 연간 광화문지 전경







 







태조연간 광화문 유구... 보존 할 것인가, 이전할 것인가.



최근 경복궁 창건당시 광화문 유구가 온전하게 모습을 드러내면서, 유구의 보존 문제를 두고 논란이 심화되고 있다. 태조 때의 광화문
유구를 그대로 보존한 상태에서 그 위에 새 광화문을 지을 것인지, 아니면 광화문 유구를 다른 곳으로 이전하고 새 광화문을 지을
것인지 의견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화재청은 12일, 「경복궁 광화문지 및 월대 지역」추가 발굴조사를 통해 이미 확인된 고종(高宗)연간 광화문지 아래에 경복궁 창건
당시인 태조(太祖)연간 광화문지(光化門址)가 온전한 모습으로 남아 있음을 확인했다며, 이를 보존할 것인지 이전할 것인지는 아직
결정된바 없다고 밝혔다.


경복궁 창건 당시의 광화문지는 고종 2년(1865년)에 새워진 광화문지의 70cm 아래에서
발견되었는데, 이는 초기 광화문이 임진왜란 때 소실되자 고종 때에 창건 당시의 기초 위에 추가로 석재를 쌓아 재건한 흔적이다.


조사결과, 창건 당시와 고종연간 광화문의 위치와 좌향(坐向)은 일치하나, 전체 규모와 통로
크기, 문의 설치 위치 등은 다른 것으로 밝혀졌다. 창건 당시 광화문 육축(陸築)은 동서 27m × 남북 잔존길이 9.6m로
고종연간 (동서 31m×남북 잔존길이 11.5m)에 비해 규모가 작았으며, 고종연간 광화문이 재건되면서 처음의 기초에 석재가
덧대어져 좌우 2.2m, 북편 1.5m(추정) 가량 확장된 것으로 추정된다.


통로 폭은 고종연간과 같이 중앙문이 넓고 동서문이 좁으나, 고종연간에 비해 중앙문은 약 15cm
적고, 동서문은 약 20~30cm 큰 것으로 확인되었다. 또한 창건 당시 문설주를 설치하였던 방형 석재(120×125×70cm)가
각 통로마다 확인되었으며, 문 위치는 고종연간의 남편 입구 쪽(남편에서 약 1.2m 지점)이 아닌 통로의 가운데(남편에서 4.8m
지점)이었음이 밝혀졌다.







 








 



 







▶ 태조, 고종연간 광화문지 현황도







 





이처럼 온전한 모습으로 창건 당시 광화문이 모습을 드러내자 문화재청은 광화문 유구의 처리문제를
두고 고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당초 문화재청의 계획은 태조 때의 광화문유구를 다른 곳으로 이전하여 보존 및 전시하는
것이었다. 광화문 복원을 위한 기초구조 안전성 연구 결과 복원위치 주변에 지하철이 설치되는 등 지반이 약한 상태라 안전문제가
우려되므로, 광화문 유구를 이전한 후 기초보강 공사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온전한 상태로 드러난 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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