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문(銘文)이 있는 백자 3건 문화재 지정 추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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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銘文)이 있는 백자 3건 문화재 지정 추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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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0.07.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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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청화백자로 세조의 장모인 흥녕부대부인의 일대기가 기록된 '백자청화 흥녕부대부인 묘지 및 석함'과 영조가 자신의 후궁이자 사도세자의 생모인 영빈이씨의 죽음을 애도하며 그 생애를 적은 '백자청화 영빈이씨 묘지·명기 및 석함', 그리고 임진왜란 이후 관우 숭배 신앙의 확산을 보여주는 유적인 보물 제142호 동묘(東廟)에서 사용했던 '백자 동묘치성병명 병' 등을 문화재로 새롭게 지정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 문화재들은 서울시가 박물관이나 개인 소장가들이 소장하고 있는 서울의 역사와 문화가 담긴 문화재를 적극 찾아내고 보존하기 위해 2009년 하반기부터 실시하고 있는 ‘우리집 장롱 속의 우수한 문화재 찾아내기’ 사업의 일환으로 2010년 상반기에 진행된 ‘명문이 있는 백자’ 일괄공모를 통해 발굴된 것이다.

서울시는 공모를 통해 발굴된 유물 가운데 문화재위원 조사와 문화재위원회 심의를 통해 국가 지정문화재로 지정가치가 있다고 인정된 '백자청화 흥녕부대부인 묘지 및 석함'은 7월 중 문화재청에 지정 신청할 예정이며, 서울시 유형문화재 지정가치가 있다고 인정된 '백자청화 영빈이씨 묘지·명기 및 석함'과 '백자 동묘치성병명 병'은 지정계획을 공고하여 문화재 지정에 대한 각계 의견을 수렴한 후 최종 지정할 계획이다.





▲ 백자청화 홍녕부대부인 묘지 - 전체 모습





▲ 백자청화 홍녕부대부인 묘지
- 묘의 주인공이 흥녕부대부인 인천이씨임을 알게 한다.





▲ 백자청화 홍녕부대부인 묘지
- 景泰七年이라는 묘지의 제작연대가 기록되어있어
1456년 묘지가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번에 국가지정문화재로 신청되는 고려대학교 박물관 소장 '백자청화 흥녕부대부인 묘지 및 석함'은 현재 우리나라 학계에 알려진 것 가운데 가장 오래된 청화백자로 15세기부터 우리나라에서 청화백자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려주는 중요자료이다. 조선왕조실록 등 정사에서는 상세히 다루어지지 않은 흥녕부대부인 인천이씨(1383년~1456년)의 이력이 자세히 기록되어 조선시대 생활사 또는 미시사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또한 15세기 해서체(楷書體)의 서풍을 잘 알려주며, 묘지를 담았던 석함까지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어 사료적·학술적 가치가 특히 높다.

'흥녕부대부인 묘지 및 석함'은 파평윤씨 정정공파(貞靖公派) 교하 종중의 윤덕훈씨가 2001년 5월에 종중 묘역을 수리할 때 출토된 것으로 묘지는 직사각형으로 총 6매로 구성되어 있다. 처음과 마지막 묘지는 순백자로 글씨가 쓰여지지 않았고, 나머지 4매에 해서체로 정희왕후(1418년~1483년)의 어머니인 흥녕부대부인의 가계와 성품, 이력, 자손들에 관한 내용들이 기록되어 있다. 끝부분에 "경태칠년병자동십월 일근지(景泰七年丙子冬十月 日謹誌)"라 쓰여 있어 1456년(세조 2)에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묘지마다 약간씩 차이는 있으나 대략 가로 26~27cm, 세로는 36~37cm, 두께는 1.5cm 내외로 지금까지 발견된 청화백자 묘지 가운데 가장 크다.





▲ 백자청화영빈이씨묘지 - 전체 모습





▲ 백자청화영빈이씨묘지
- "어제(御製)"라고 되어 묘지문을 영조가 직접 지은 것임을 알 수 있다





▲ 백자청화영빈이씨묘지
- 제작연대가 1764년 임을 알 수 있다.

현재 연세대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백자청화 영빈이씨 묘지·명기 및 석함'은 영조가 자신의 후궁이자 사도세자의 어머니인 영빈이씨가 1764년 세상을 떠나자 그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마음을 글로 표현한 유물이다. 연세대학교 경내에 있던 영빈이씨 묘인 수경원(綏慶園)을 1970년 서오릉(西五陵)으로 옮길 당시 출토되었다. 묘지(墓誌, 죽은 사람의 이름과 경력, 생몰연월일, 성품, 가족사항 등을 새겨 무덤 옆에 파묻는 돌이나 도자기)와 함께 20점의 명기(明器, 죽은 사람과 함께 묻기 위해 실물보다 작게 상징적으로 만든 그릇, 악기, 생활 용구 등의 기명), 3개의 석함까지 잘 남아 있으며 제작 수준도 높다. 특히 1764년이라는 확실한 제작연대를 가지고 있어 조선후기 왕실유물의 일면을 잘 파악할 수 있다.

영빈이씨의 묘지는 총 2벌로 이루어져 있는데 각기 장방형으로 9줄 15자씩 구성되었다. 글은 묘지명 제목에 "御製暎嬪李氏墓誌"라 쓰여 있어 묘지문을 영조가 직접 지은 것을 알 수 있고, 글씨는 영조와 영빈 사이의 맏딸 화평옹주(和平翁主)와 혼인한 금성위(錦城尉) 박명원(朴明源)이 썼다. 오랫동안 해로한 부인을 잃은 영조의 애틋한 마음과 영빈이씨의 가계와 성품, 자손에 대한 내용이 실려 있다.





▲ 명빈이씨명기

현재 서울역사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백자청화동묘치성병명병'은 무게중심이 아래로 내려가 안정감을 주는 형태의 19세기 작품이다. 몸체 상단부에 돋을새김으로 된 "東廟致誠甁 庚辰三月日(동묘치성병 경신삼월일)"이라는 한자 명문이 있어 중국의 명장 관우를 모시는 동묘에서 사용했던 병으로 경신년에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기형과 제작기법을 고려했을 때 경신년은 1820년(순조 20) 또는 1880년(고종 17)으로 추정된다. 이 유물은 서울시의 역사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사료적 가치를 가질 뿐만 아니라 백자로서 완성도가 높아 19세기 도자사 연구에도 좋은 자료로 평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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